#. 프롤로그
‘존재하지 않는 가식된 진실’
무엇을 탓하리. 덧없는 굴레에서 행복하여라. 하지만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없는 전자회로-거대한 CPU의 지휘에 맞춰 정해진 굴레를 걷다 지친 작은 미생물- 아 행복하여라. 여기는 클라인 병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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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털썩 주저앉게 된 것은 필시 무엇과 부딪혔음이다. 벌집처럼 줄줄이 들어선 대문 속에는 똑같은 구조의 공간이 치밀하게 늘어서 있음이다. 유일하게 그들의 공유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차가운 아파트 복도바닥이다. 잡다한 잡동사니들이 날카로운 복도의 미학을 어지럽히고 있다. 쌉쌀한 시멘트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온기 없는 몸뚱이를 내게 비빈다. 가끔가다 그 잡동사니들이 심심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골탕 먹이는 일이 있기는 하건대, 작다고는 할 수 없는 날 밀친 것은 필시 그것들은 아니렷다. 후덥지근하여 차라리 이렇게 누워서 시멘트 바닥과 블루스를 추고 있는 편이 적잖이 시원키는 했지만, 적어도 날 밀친 것이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이 꼴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곤한 팔을 움직여 몸을 추켜 세워보니 후줄근한 내의 차림의-그리고 익숙한-아저씨다. 얼떨결에 난 그를 알아봤다. 내 옆집 1506호에 기생하는 하나의 일벌. 똑같은 내의만 몇 벌이 있는지 볼 때면 그는 항상 이 차림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신문을 가지러 나와서는 무엇을 주섬주섬 거리는지 내 잠결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라는 것 의외에 내가 아는 바는 없다. 아, 가끔-아니 거의 매일- 앙칼진 목소리와 신경질적이면서 굵직한 목소리가 온 벽을 긁어대는 통에 그의 목소리라면 조금은 알고 있다. 물론 방음이 안 되어있음을 한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그것은 유일한 오락거리이다. 덕분에 난 1508호에 사는 싱그럽고 탱탱한 아가씨의 음성을 매일 들을 수 있다. 1506호의 지방방송만 아니라면 이곳은 꽤 살만하다. 어쨌든 이렇게 그와 대면하는 것도 처음이다. 옆집 살이라지만 나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인 침묵밖에 없다.
“괜, 괜찮소?”
덤덤히 일어나자 얼굴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싸하고 덮친다. 차라리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가 적잖이 당황한 모습으로 날 주시함을 느꼈다. 짤막하게 예라고 대답한 뒤 우뚝하니 서있는 그를 제치고 터벅터벅 옥상을 향해 기어가듯 걸었다. 눅눅하게 달라붙은 습기와 윙윙대며 날아다니는 주먹만한 파리들이 짜증을 배가시킨다. 계단을 오르며 얼핏 스쳐보건대, 그는 열대야에 혼을 빼앗긴 듯이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렴, 아무래도 이놈의 더위란 놈은 이 벌집을 그대로 쪄서 뭉텅뭉텅 잘라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옥상은 더 심각했다. 태양과 가장 근접한 위치라서 그런지 오히려 더위는 있는 대로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다. 산채로 증발해버릴 듯이 기승을 부리는 햇빛이 휑하니 벌어진 입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간다. 절로 입이 벌어져 단내를 뿜어내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이 아파트 밑으로 뛰어내릴까도 하는 신기루가 펼쳐진다. 머리를 쪼개어 그 속을 식힐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다시 힘겹게 기어온 계단을 내려간다. 스르르 녹아 흐느적거리며 제집까지 흘러가면 어떨까- 하며 내가 사는 15층으로 향해간다. 더위는 집요하게 어디든 내 비위를 농락한다. 펄펄 끓는 용암속이 이보다 못하다. 아니, 차라리 더 뜨거우면 차가워질까? 무한의 뜨거움은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까?
현관을 열자 익숙한 곰팡이 냄새와 이름모를 쉰내가 물씬 풍긴다. 반쯤 익은 몸뚱이를 이끌고 뜨겁게 달궈진 슬리퍼를 내팽개친 뒤 침대 겸 소파인 철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의 살집이 모두 증발했는지 뼈가 아프다. 생존했음에 안도하며 무거운 손가락을 움직여 리모콘을 눌렀다. 내 머리통만한 액정에서 ‘사상 최고의 더위’ 라는 제목으로 속보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모습과 더위를 식혀보고자 계곡으로 몰린 인파 같은 자잘한 소식이 주를 이룬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데 가장 좋은 고문은 찜통에 넣고 쪄버리는 것이다. 한 여름에 찐빵을 먹는 것도 가히 즐겁다. 내 머릿속의 스크린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 찐빵을 보여준다. 군침이 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돈도 다 떨어져 간다.
빌어먹을-히틀러 콧수염을 가진 편집장은 쭉 째진 눈으로 더 이상 내 원고는 받지 않는 다고 한다. 나는 사정을 하며 빌었지만 그 복고풍 멜빵바지를 찢어내는 한이 있어도 허락할 리가 없었다. 표독스러운 새끼-빌어먹을.
부모님의 유산을 써서 간간히 버텨온 하루살이의 목숨도 바닥이 나간다. 얼마 남지 않은 지갑을 털어보기 위해 뻑뻑한 눈동자를 굴린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눈을 후벼 판다. 지랄 같은 햇볕이 창가에 둔 화분에 엉긴 것이다. 순간 텁텁한 공기가 폐에 가득 채워지자 뇌는 칼칼하게 팽창한다. 자극을 받은 뇌는 신경전달 세포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고, 난 벌떡 일어나 그 화분을 집어 들었다. 잠시 망설인다. 칙칙한 방안에 한 다발 꽃이 되어라- 라며 들여 놓은 조화(造花)이다. 하지만 이 방안에서 이 조화는 무슨 일인지 진짜 꽃 마냥 가장자리부터 변색해 가는 것이다. 빌어먹을.
앙칼진 소리와 함께 화분이 방바닥에 부딪혔다. 영롱하던 화분 조각조각이 칙칙한 방구석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일말의 후회감도 덩달아 흩어졌다. 화분이 깨졌다고 죽을 리 없는-이미 죽어, 아니 애초에 살아있지 조차 않은 꽃이므로-흰색 국화였지만 버려진 그것은 울부짖고 있었다. 빌어먹을. 침대에 드러누웠다. 물기가 스며 곰팡이 핀 천장이 달가울 리 없으나, 이 방구석에서 유일하게 조잡하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많은 시간 나와 함께하는 침묵의 형상이었다. 소곤소곤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에서는 이제 비 소식을 알린다. 솔깃해진 귀를 바짝 세운 뒤 천장에 핀 곰팡이에 머물고 있던 시선을 돌렸다. 우리나라지도와 함께 등고선들이 자잘하게 그어져있었다. 이르면 오늘 밤부터 오겠다는 캐스터의 말에 내 신경은 극도의 짜증으로 치닫는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껐다. 으레 이런 더운 날에 비까지와 집안을 온통 눅눅히 물들인 다음날이면, 온 집안-단칸방이지만-에 습기와 함께 곰팡이 녀석들의 무도회장이 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면 이 집안에서 제 색깔을 갖춘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있었다면 그것은 방금 산산 조각나버렸다. 배에서 걸신의 숟가락이 사방을 긁는다. 텔레비전위에 홀쭉이 놓여있는 지갑을 집어 들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햇볕이 그 삼지창을 들어 모든 인간을 후려친다. 담뱃불로 지진 듯이 듬성듬성 곰팡이가 피어있는 커튼을 치자, 햇볕은 어떻게든 들어와 보려는 듯 가증스러운 몸짓으로 꾸물댄다. 비소를 남긴 나는 바닥에 피어있는 화분 조각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현관을 열었다. 눅눅하고 텁텁한 어둠에게 방안을 지배하게 한 나는 그것들을 뒤로 한 뒤 밖을 나섰다.
요행이도 라면살 돈은-다행히도 마침 슈퍼에서 세일을 하는 기간어서- 남아있었다. 덕분에 3일은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적잖은 만족감을 느끼며 따끈하게 덥혀진 거리를 사뿐하게 걷는다.
“손님!”
손님이 내 이름은 아니지만, 방금 전 난 정당한 고객이었으므로 뒤를 돌아볼 이유는 충분했다. 찰나, 혹시 내가 돈을 적게 냈거나 물건을 더 가져왔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 여주인은 뒤뚱뒤뚱 걸어오더니 나에게 휴지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내 몸을 가리키며-
“닦으세요.”
내 티셔츠엔 무언가 검붉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제대로 된 거울하나 없는 집안이라지만 제 몸에 붙어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며 휴지를 문댔다. 뭔지는 몰라도 딱딱하게 눌어붙어버린 그것은 생닭이 썩는 냄새가 났다. 덕분에 가벼워졌던 발걸음에 다시 무거운 추가 매달아 지며 불쾌함에 눈살이 경련을 일어댔다. 어제부터 음식물이라고는 물밖에 먹은 것이 없고, 빨간 것은 요 근래를 통 털어 화장실 타일조각 밖에 본적이 없다. 어디서 묻은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끈적거리며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음에, 벗어서 라면을 담은 봉지에 쑤셔 넣고 방금에 만족감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고막을 긁어댔다.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자 단지 안,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선 행여 살인사건이라도 즐거운 일탈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살인사건정도라면 며칠간은 나와 침묵의 장대한 토론거리가 되기엔 충분한 소재였다. 지난번 주차되어 있던 모든 차들의 타이어에 구멍을 낸 범인 유추하기 위해 침묵과 벌였던 토론이 장장 5일간 펼쳐진 것이다. 결국 결론은 305동에 사는 유명한 꼬마로 일축되었고, 실제로 그 꼬마가 범인이었던 것을 난 아직도 침묵과 간간히 토론하고 한다. 어느새 도달한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자 요란한 웅성거림이 따갑게 맴돌았다. 그중에 ‘사람이 죽었대!’라는 말은 후덥지근한 공기를 말끔히 날려버릴 정도로 솔깃하게 다가왔다. 행여 나의 줏대 없는 상상 때문에 진짜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싸-하는 줄기가 등을 타고 온몸에 퍼지며, 내 귀는 열심히 동냥질을 시작했다.
“어머, 사람을 토막으로 잘라?”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었다지 뭐니, 글쎄! 그걸 처음 발견한 앞 동 새댁은 병원에 실려 갔다지?”
난 문득 요란한 사이렌 소리의 근원이 그 구급차임을 알 수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애나 안 떨어 졌나 몰라?”
내 호기심은 내가 유일하게 지켜오던 침묵의 미학을 깨트리게 했다. 거침없이 내뱉어진 말은 필시 누가 죽었냐는 것이었다.
“바로 이 동 1506호 아저씨 있잖우? 왜 그, 넉살좋게 생긴 아저씨말이유.”
따뜻한 열기를 내보내기 위해 열려있던 모공이 순식간에 움츠리는 것을 느끼며 오싹한 것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바로 몇 시간 전 나랑 부딪혔던 그를 기억해 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하나의 몸뚱이였던 그는 이제 난도질당한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사이다를 마시다 코로 넘어온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 인파를 빠져나온 찰나, 곁에 있던 경찰관을 붙잡았다.
“자세한건 국과수에 의뢰해봐야겠지만, 사망 추정시간은 3일 전입니다.”
오싹하게 얼린 얼음 망치가 두개골을 열어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듯이 멍-했다.
그는 몇 시간 전까지 살아있었다!
때 아닌 망자의 유희인가. 오후의 그 사건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흘러 나의 심연에 자극을 준다. 난 나의 진실한 벗인 침묵을 맞이하기 위해 불빛을 일제히 차단했다. 그리고는 눅눅한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으레 그렇듯 침묵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사실 삼류잡지에 연재하는 삼류작가라도 나 역시 희대의 추리 소설가이다. 비단 셜록 홈스의 비상한 머리도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침묵이 말하길-난 그를 만났다. 오늘 하루 가장 시원했던 순간에 그가 있었다. 사람들은 결코 제집 앞 복도가 그리 시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할 것이다. 딱딱한 모서리만큼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동하는 것이 얼마나 시원하리요. 시간이 날 적에-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에-한번 엎어져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거슬러-그런 기회를 제공한 것은 고깃덩어리 씨였다. 왠지 모르게 그는 넋이 나가 있었다. 정말로 넋이 나가있었을까? 제길, 그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 비상한 머리가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난 너무 오컬트하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는 비약으로 인해 가끔은 달빛의 쾌청함속 토끼의 존재를 믿고 싶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난 그 토끼를 찾아 죽여야 하니까. 돌아와서-그에 대해서 듣기론 범인은 오리무중, 사망시간은 기타요인으로 인한 사체변질을 감안 하더라도 2일 전이었다 한다. 침묵이 말하건대-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이 월요일이므로 오늘은 화요일이 당연하다. 범인은 사체를 적어도 1일 이상 보관한 셈이다. 그렇다면 낮에 내가 본건? 부딪힌 건? 망자는 왜 잠들지 않았는가?
손을 뻗어 바닥에 뒹구는 수첩을 집어 들었다. 집요하게 캐물은 끝에 얻어낸 토론의 주체이다. 어둠에 눈이 익는 법은 이미 득도한지 오래다. 그것은 침묵과의 토론의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음이다. 침묵이 말하길-고깃덩어리를 담은 봉투는 오늘 날짜로 보급된 것이다. 정리하길 범인은 그를 토막 내어-그것도 20개 이상의 덩어리로- 1일 이상 진열했거나 다른 곳에 보관하여 오늘 버린 것이다.
“나, 난 아니라구요!”
벽에서 소리가 긁는다. 침묵과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바싹 떠 벽을 투시라도 할 듯 쳐다본다.
“당신을 김강수씨 살해 용의자로 긴급 체포합니다.”
“제, 제가 왜 남편을?”
“알고 있어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해 파출소를 몇 번 가셨더군요. 그리고 낮에 자택수사를 하며 압수해 갔던 목공용 톱에서 남편 분의 혈흔이 나왔습니다. 지문은 물론 한가희, 당신 것과 남편 분 것이었지요.”
빗줄기가 세차게 몰아치자 창문이 들썩거렸다. 그녀는 결코 범인이 아니었다. 침묵이 말하길-봉투에 지문은 오로지 고깃덩어리 씨의 것만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베이터 감시테이프에 의하면 오늘 엘리베이터는 15층사람 그 누구도 태우지 않았다.
“전,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 한다구요!”
저런 사람이 70Kg에 육박하는 살점들을 지고 계단을-15층에서- 내려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곧이어 날카로운 금속성과 여인의 통곡을 끝으로 벽 저편에선 고요가 무겁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난 봤다. 그를 보았다! 행여 이 지독한 더위에 정신적인 착각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침묵과 나의 대화는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 잠깐. 분명 살점을 담은 봉투에는 ‘피해자의 지문’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봉투는 분명 ‘오늘’ 날짜로 제작되었다. 그것은 피해자가 오늘 살아 있었음이다! 온몸에 전류가 동하 듯 경련이 일며, 헉 소리가 뛰쳐나왔다. 난 결코 더위에 혼을 팔아 환상을 본 게 아니다. 그는 오늘 내 코앞에서 서있었다. 비슷했다-몸이 뜨거워지자 난 가만히 드러누워 있을 수 없었다. 소스라친 팔을 움직여 전등을 키자 두 번 정도 깜빡인 전등은 눅눅한 내 방을 훤히 비추었다. 몇 가지 없는 가구 중엔 색이 바래버린 서랍이 있었다. 부시다시피하여 그 속을 뒤집어 낸 뒤 난 그것을 찾았다. 손때에 더렵혀진 파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빌어먹을-
난 토끼를 쫒는다. 벌써 15년이 흘러 남들의 기억에선 사라졌겠지만, 난 너무나도 기억한다. 파일 속의 저 구질구질한 꼬마를 알고 있으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낡은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것들이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저마다 ‘범인은 오리무중’이라는 식의 헤드라인을 달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을 공공연하게 떡하니 박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의 꼬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꼭 잡아주세요!’
빌어먹을. 나의 이 기억력은 그놈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 부모가 죽던 그 순간에 두 눈은 멀쩡히 부릅떴을 진대, 그 놈을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누군가 뇌세포의 한 부분을 삭제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내 인생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빌어먹을. 불현듯 고깃덩어리 씨의 난도질당한 얼굴이 제 아버지와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직감이라면 직감이되, 흡사 닮은 점이 있음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범인이란 작자는 이 세상, 심지어는 내 기억 속에서조차 그 행방을 묘연케 한 것이다. 이처럼 황당한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난 몇 번이고 되새겨 읽었을 기사 한 줄을 다시금 상기한다. ‘시체는 잔혹하게 토막 나 있었다.’
물증은 없지만 왠지 15년 전 그 토끼 놈의 자취가 사방에 진동하는 듯 하다. 더욱이 가장 필요한 증거물인 내 자신이 그 증거물로써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를 탓하리요. 또한 그 현장에서 나 혼자 살아남았음일진대, 마치 그 토끼 놈이 내 머리로 방아를 찧었는지 그 날 이전의 기억은 희뿌연 담배연기만 가득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신의 선택된 만찬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거듭될수록 화가 치민다. 어쩌면 그 토끼 놈이 새빨간 눈알을 부라리며 주위를 맴돌지도 모르건대,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그 가치를 못하니 말이다! 게다가 어제 이미 저승길에 올랐을 사람이 하필이면 내 눈앞에 떡하니 서있었는지, 그것 역시 못마땅한 일이외다. 하지만 증거도 있는 마당에 이것을 무엇이라 설명하리요. 귀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리는 수없이 많으나 그것을 증빙하는 물증이 없으니 한탄스러울 다름이다. 아니, 그렇게는 억울해서 못산다. 귀신같은 우라질 것에게 내 부모와 더불어 하루살이 인생의 아까운 한 부분을 빼앗겼다고는 살지 못한다. 그것은 필시 사람이렷다. 완전 범죄를 도모한 비상한 천재임에 틀림이 없음이다. 침묵이 말하길-그러면 낮에 고깃덩어리 씨는?
눈은 손끝을 따라 파일의 페이지를 넘긴다. 15년. 실제 나의 나이는 15살이다. 그 저주받은 세월을 선사한 제 머릿속엔 오로지 그에 대한 집념밖에 없다. 난 주석을 달 수 없는 일들이 저를 따라다닌다고 굳게 믿는다. 아니, 내가 따라다닐 것이다. 나의 시작이 그러했으며 비참한 하루살이를 연명하는 굳은 이유이기도 했다. 빠르게 넘어가던 손끝이 문득 한 페이지를 뚫을 듯이 멈춘다. 몇 번을 들이켰을 그 기사가 새삼스레 다가온 것이다. ‘미결사건목록’- 시간대도 다르고 장소도, 아무런 연관성 없는 그 사건들 중 3번째 목록에 제 부모의 사건이 들어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란-하나같이 피해자의 살가죽을 토막토막 살라먹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또 다른 공통점이란 증거가 없다는 것. 마치 신이 동조하는 피의 축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엔 내가 서있었음은, 잊어버린 기억속의 피비린내 나는 노스탤지어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왔다면 살아온 이유-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이 목록의 새로운 이름이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살아남은 목격자를 조롱하는 신의 유희일망정, 빌어먹을 토끼의 자취를 쫒아갈 것이다. 이건 누가 선사할 기회일지도. 하지만-
뇌로 유입되는 어느 혈관을 따라 독소가 침투하여 빠르게 번져간다. 그것은 매우 아리고, 뇌라고 불리는 살점에 이르러 소다수에 탄산기포가 터지듯이 탁탁거리며 요동친다. 빌어먹을- 으레 제 주변엔 해설을 거부하는 사건들이 저를 조롱하는 것이다. 사위가 하얘지며 그 독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내 몸뚱이는 벌떡 치켜세워지더니, 손에는 파괴욕구를 벗 삼아서 물건을 냅다 쥐는 것이다. 영롱한 꽃병의 볕이 가련하게 쨍쨍하다. 가소롭다. 조화주제에 멋도 모르고 살아있는 척인 것이다. 애초에 살아있지도 않을 거면서 꽃 행세를 하느냔 말이다. 손에 힘이 실린 찰나- 잠깐만?
순간 섬뜩함이 손에 동한다. 유심히 꽃병을 들여다 본 후 군데군데 생채기가난 바닥을 둘러보았다. 낮에 분명히 내가 꽃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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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국화. 꽃말은 진실.”
방안에 나 아닌 목소리가 울렸다. 귀지를 파내기엔 너무나 명확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봤을 때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사람이 서있었다. 어둠보다 더 시커먼 수도사복 같은 것을 입고선, 그 심연의 어둠 속에서 불현 듯 말하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보다 더 아름답지 않나?”
우선 적으로 크게 눈을 부라릴 준비를 했다. 그것은 놀람과 동시에 두려움의 표식이기도 했다.
“시끄럽게 하지 않아도 돼. 그걸 던질 셈인가? 오우, 저런.”
묘한 마력이다. 그의 말은 의사가 진료하는 메스의 칼날처럼 팔의 신경을 교묘히 조작했다. 꽃병을 창가에 내려놓자 그는 미소를-하지만 그의 얼굴은 모자 속 어두운 그늘에 묻혀 도무지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지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한번 죽은 것은 소생하지 않지. 그게 섭리라는 거야.”
하지만 난 분명 낮에 꽃병을 던졌다. 그것은 바닥에 어지럽게 생긴 생채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죽었다 살아난 것은 처음부터 살아있지 않았다는 소리지. 살아있다는 것은 너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
내입에서 뱉어진 말은 정확히 당신은 누구냐는 것이었다.
“오우, 저런.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군. 물론 그렇게 물었을 때 난 이렇게 대답했었지. 노코멘트-. 하지만 넌 날 알아. 나와 언제나 함께-침묵.”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이 그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들렸다.
“난 네가 좋아. 넌 조용하거든. 살아있는 것은 그저 잡음에 지나지 않지.”
어쩌면 정말 내가 더위에 혼을 팔아……
“헛것을 본다고? 아, 놀라지 마. 운명을 읽어내는 것 보단 쉬운 잔재주지. 애석하게도 네 녀석에겐 팔수 있는 혼 따윈 없어. 나를 만나는 것들은 모두 그런 제품들이지-불량품 말이야.”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섭도록 오싹한 한기에 전율이 일어난다.
“왜? 어째서? 네 녀석이 가장 많이 하던 질문 아닌가? 선과 악, 동전의 앞과 뒤. 마찬가지로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란 그 뒷면에 두려움을 달고 다니기 마련이지.”
방 전체가 핑핑 도는 느낌과 함께 비가 내리던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진공상태에 빠진 듯한 고요가 어깨를 짓눌렀다.
“좀 않지 그래?”
무릎이 제풀에 꺾이더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에 주저앉아버린 나는 그를 쳐다봤다. 이것은 공포였다.
“너희를 통제하는 건 정말 간단해. 우리는 그저 죽음에서 기다리면 되거든.”
저승사자?
“관리자라고 해두지. 특히 난 불량품을 수거하는 일을 하지. 오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지 알아. 앞서 말해두자면 산다는 것은 결국 시간의 굴레라는 것이지. 너희들은 그 굴레를 삐딱하게 걷는 것뿐이야. 하지만 산다는 것은 곧 죽는 거지. 걱정할 필요 없어. 운명은 항상 돌아가지.”
오슬오슬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쓱 내려가자 얼음장위에 발가벗겨진 채 내몰린 기분이었다.
“자 그럼, 언제나 그랬듯이 같이 가 보자고.”
시야에서 별안간 그가 공간에 스며들듯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진공상태는 계속되었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길 희망하며 일어섰다. 고요하지만 왠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느낌이 사방을 휘감는다. 현관. 현관 밖에서 밝은 빛이 뿜어진다. 달빛의 토끼가 저기 있다!
문을 열자 그곳이다. 익숙한 앵두나무, 매일 아침 실랑이를 벌이던 세숫대야. 노곤한 햇살이 대청마루를 비출 때면 후줄근한 속옷차림으로 대자로 뻗어 낮잠을 청하던, 가끔은 내 머리통만한 수박을 알차게 쪼개 시원하게 베어, 마당으로 씨를 날리던 그 대청마루. 새끼 때부터 날 졸졸 따라다니던, 그리고 유일한 친구였던-그리고 복날에 사라졌던- 누렁이의 집.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다던 낡아빠진 기와집에 들어가면, 왼쪽에 부모님이 잤던 방과 그 오른쪽에 달려있는, 여름이면 쉬파리가 들끓던 화장실. 그 맞은편에 온갖 구슬을 잔뜩 모아놓고 몇 시간이고 방안에 틀어박혀 그 영롱함을 바라보는 콜콜한 재미에 세상을 살았던 꼬마의 방.
돌아왔다! 잃었던 하루살이의 기억이 생생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은 신문기사 속의 그곳, 오늘로부터 정확히 15년 만에 돌아온 그곳 이었다! 주변을 둘러볼수록 뿌연 연기속의 시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힘껏 비볐다. 볼 가죽이 찢어질 정도로 쭉 늘였다. 이곳은 현실이다. 꿈이 아니었다.
“또 어떻게? 라고 물을 셈인가?”
귓가에 소리가 엉겼다. 흡사 방금 전 내 방안의 그와 같은 목소리다. 주위를 둘러봐도 내가 잃어버렸었던 그 기억속의 낡은 자전거, 비료를 푸던 삽, 낡은 고무호스 따위 밖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크크.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나? 과거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나?”
그래, 그거다. 난 지금 과거에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영화 타임머신처럼!
“틀렸어! 이게 바로 너의 미래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귓가에 엉긴다. 헛소리.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이다. 너희는 시간의 불량품.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지. 미래의 일이니까! 시간의 흐름이란 건 너희에게 존재하지 않아.”
난 삽을 집어 들었다. 혈관으로 분노가 흘러 들어간다.
“오늘이 15년 전 그날 아닌가?”
그래, 오늘이다. 오늘이야. 달빛의 토끼를 드디어 볼 수 있다. 때맞춰 부모님 방안에서 비명이 뛰쳐나왔다. 죽인다, 죽여 버린다! 맨발이 허물이 까져 쓰려도 냅다 뛰었다. 대청마루를 훌쩍 뛰어넘어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있는 토끼 녀석에 머리를 삽으로 냅다 찍었다. 잡았다!
왜지? 어째 서지? 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적잖이 청아하다. 어머니, 납니다. 아들이라고요! 왜지? 어째 서지? 왜 내 앞에 아버지가 죽어있는 거지? 그래, 기억을 헤집어보자. 묵직한 느낌. 터져 나오는 뇌수. 솟구치는 선혈. 그래, 토끼를 잡은 거야! 근데. 근데 왜 아버지가 죽어있는 거지?!
잃었던-혹은 새로운-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목격한 아버지라는 작자가 가지는 광기였다. 그래, 어머니의 얼굴엔 좀처럼 시퍼런 피멍이 가라앉는 날이 없었다. 매일 밤마다 시끄러운 소음에 난 매일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잠이 들었다. 하루는 그 작자가 그 방에 다른 여자를 들였다. 어머니는 내방으로 기어와 통곡을 했고 그 작자는 입 닥치라며 제 부인을 개처럼 다뤘다. 그의 여식에게 까지 허리띠를 휘두른 그 작자는 성난 얼굴로 방에 돌아가 그 젊은 년과 농을 나눴다. 그때 상처. 팔뚝에 흉터-순간 팔뚝이 따끔하더니 날카로운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오고는 순식간에 흉터가 되었다-가 남아있다.
웃음이 터진다. 뭉그러진 선혈의 영롱함을 아시오? 일그러진 그대의 대가리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크크. 하하! 하하하!”
그대의 잠들지 못한 웃음에 내 손길이 거칠어지오. 조용해 주시오. 나는야 달빛의 토끼. 만월의 붉은 달을 적실 방아 찧는, 나는야 만월의 천사. 즐거이 부르고 춤 추리외다, 만월의 아리아를.
#.
두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은 간데없고 색깔을 구별할 수 없는 천조각과, 바닥에 넘쳐흐르는 붉은 선혈. 무작위로 찢겨진 무언가가 그저 존재했음을 알렸다. 그 가운데 온몸에 피칠 갑을 한 사내가 찌그러진 삽에서 핏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었다. 이따금 광소를 터트리며 그는 조용히 흥얼거리길 일삼았다. 그리고는 방 한쪽에서 서서히 핏물이 베어가던 병풍을 와락 쓰러트렸다. 그 뒤에는 한 사내아이가 차마 울음을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살인자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와 씩- 웃었다.
“달빛의 토끼는 바로 너야.”
그리고는 크게 웃더니 삽을 질질 끌며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그대로 실신하여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곤히 잠들기 시작했다.
-끼익
대문을 열고 나간 그곳은 추적추적 비가내리는 작은 아파트 방안이었다. 눅눅한 공기가 후끈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마치 수도사복장 같은 옷을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서있었다. 공기가 묘하게 일렁거림을 남자는 보았다. 남자는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가 벽을 긁으며 묘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수도복 안에서 목소리가 아닌, 작은 울림이 울렸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진동이었으나 남자는 들을 수 있었다.
“또 보자고. 킥킥.”
“으아!!”
삽을 휘두르며 그자에게 달려든 남자는 그대로 창문에 부딪혔다. 아릿한 통증이 남자를 엄습하며 곧이어 물체는 자유낙하를 실행했다. 쿵-
15층 밑에는 삽을 든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웃고 있었다.
산산 조각이 난 창가에 서있던 수도복을 뒤집어 쓴 사람은 발치에 떨어진 꽃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묘한 울림.
“14번째 불량품, 교대이후 14만 번째 죽음.”
#.
“또 저 환자니?”
1507호. 이따금 괴성이 터져 나오던 방 앞에 간호사 둘이 못마땅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았다. 그 속엔 핼쑥한 몰골의 남자가 환자복을 입고 쥐 죽은 듯이 앉아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웃고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조용하겠네. 나 참, 저 환자 뭔지는 몰라도 15일마다 저 꼴이야.”
“왜 그러는데?”
“15일을 주기로 발작했다 잠잠해졌다 그러거든. 14일까지는 이 겨울에 덥다면서 헉헉거리는 둥 거리며 잘 자다가 오늘 같이 15일 째만 되면 달빛의 토끼라느니, 히틀러 콧수염이라느니. 자신이 셜록 홈스라나? 하여튼 그리고 갑자기 괴성을 지르다가 을씨년스럽게 웃고 있는 거야.”
남자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간헐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몇 년째 저러는 거야?”
“내가 이 병동으로 오기 전부터 있었다던데? 그리고 꼭 발작한 후에는 14번째 불량품, 몇 번째 죽음- 이라고 말하고는 잠잠해진다고. 오늘이 14만 번째더라. 그거 세는 정신은 말짱한가봐.”
간호사들은 또각또각 거리며 복도를 지나쳤다.
“아참, 그 옆방 1506호 환자도 알아?”
“왜?”
“1507호 보다 더 심각한거 있지 글쎄? 그 사람은 3일을 주기로 발작을 일으키는데, 3일 째 마다 스스로 온 몸을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거야 글쎄.”
간호사들은 1506호-라는 문패가 반짝거리는 문 앞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렇게 묶어 논거야? 미라 같다, 얘.”
“어유, 징그러. 그만 가자. 추운데 가면서 군고구마나 사먹자.”
“니가 사는 거지?”
“어머? 요 앙큼한 것이, 입 싹 닦으려고?”
그들이 지나간 후 복도에는 불이 꺼졌다.
#. 또 하나의 프롤로그(or 에필로그)
그는 당황했다. 그리고 애써 떨리는 기색을 감추며 목소리를 쥐어짜듯 토해냈다.
“괘, 괜찮소?”
“예.”
자신에게 부딪힌 사내는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옆집인 1507호에 사는 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 묻은 피가 총각의 옷에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행여 들키면? 총각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지나쳤고 그는 멍하니 총각의 뒤에 서있던 수도복 입은 사람을 떨리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 저 녀석의 살아있음 역시 불량품일 테니.”
“내, 내가 죽인 건 내가 아니오! 그, 그건.”
“오우, 이런. 그건 또 다른 나라고 하고 싶은 건가?”
그의 후줄근한 내의가 축축해졌다.
“그, 그렇소. 그, 그는……”
“바로 너지. 크크. 재미있군. 네 녀석은 조금 더 특별한 불량품이야.”
“그렇지 않소! 그는 또 다른 나일뿐이오! 내안에 기생하는 다른 인격일 뿐이오! 결코……”
“지금의 너지. 3일전의 너라고? 문을 열어봐.”
남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집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선 자신이 놀란 눈빛으로 서있었다.
“저건 3일 후의 너야.”
문안의 또 다른 그는 씩- 웃으며 그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목공용 톱에 후덥지근한 햇볕이 어른거렸다.
- Rotate.
작가의 말
의도하지 않은 호러가 되어버린 기분이군요...
클라인 병은 독일의 수학자 클라인이 이론적으로 발견한 4차원'위상기하학적 도형'이라고 하더군요. 이론적으로 뫼비우스띠의 4차원적인 개념인데, 현실에서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클라인 병 이론에서 모티브를 따서, 과거,현재,미래 라는 개념을 뒤섞어 보자는 발상에서 쓰게됬는데...
역시 낙서의 한계군요...
더운날 건강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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