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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연재/판소회원 판소계 여행기 (리메이크)

판소회원 판소계 여행기 (리메이크) 1장 집결(上)

[독립개체레벨 4. 실험체 055-2889호의 의식 및 인식의 분화에 성공했습니다.]

“대상소체와의 적합성 분석.”

[분석합니다. 분석 중, 분석 중, 분석 중 …… 분석완료 소체와의 적합성이 96.4%로 융합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융합.”

[융합을 시도했을 시 거부반응 및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은 0.006%입니다. 융합하시겠습니까?]

“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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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수면위로 부상하는 스쿠버다이버마냥 천천히 돌아왔다. 마침내 수면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순간, 그는 눈을 번쩍 치켜떴다.

“여기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던 그는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무성하게 들어찬 나무들은 사이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아니었다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는 건지를 고민했으나 도저히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당황한 남자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물건들을 발견했다. 보따리처럼 보이는 꾸러미와 낡은 칼이었는데 남자는 우선 칼을 집어 들었다. 기억을 상실한 남자로써는 어쨌든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칼은 그의 손에 착하고 감겨들었다.

“어디보자…….”

칼을 왼손으로 옮겨 쥔 채 보따리를 풀어보니 겉에서 본 것에 비해 그다지 많은 물건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엔 제법 많은 금화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육포 등 건조식량이 조금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끈 것은 두 장의 종이였다. 난생 처음 보는 새하얀 종이를 집어 들어 펼치자 굉장히 딱딱하고 일률적인 글씨가 보였다. 남자는 이 생소한 종이와 글씨체에 낯설음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는 자신에 대해 잠시 동요했다. 동요를 수습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윽고 남자는 종이에 쓰인 내용에 주의를 돌렸다.

[각성을 축하합니다 코마. 당신은 페르셋력 12553년 이곳, 판소 표준 세계(FMW)로 넘어 온 20번째 방문자입니다. 사실 당신의 각성을 확인한 것만으로 모든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니 더 이상의 관심이나 간섭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인 감상과 20번째라는 상징성에 의해 당신에게 몇 가지 도움을 주겠습니다.

우선 이 종이와 같이 놓여 있는 칼이나 망토는 당신이 원래 쓰던 물건입니다. 아니, 이 경우엔 당신의 육체라고 해야 할까요. 여하튼 지금은 별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혼란을 피하기 위해 당신의 것이라고 하죠.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건 요긴하게 쓰일 노잣돈과 이 산속을 빠져나가면서 허기에 지치지 않도록 해줄 건조식량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들고 있는 종이 중 이 글이 쓰여 있지 않은 다른 한 장은 이 지역에 대한 간략한 지도입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이르는 길이니 괜히 다른 곳을 헤매지 말고 쭉 따라가는 게 좋을 겁니다. 눈앞에 난 길을 계속 따라가면 되지만 혹시나 길을 잃을까봐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 안에 나침반을 넣어놨으니 요긴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이 세계에서 나침반은 제법 비싼 물건이니 나중에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그럼 ‘편안한 여행되시길.’]

“……내 이름이 코마였구나.”

어딘가 조금 핀트가 나간 감상을 내뱉은 뒤, 코마는 편지의 뒤에 있던 또 다른 종이를 펼쳐보았다. 편지에 적혀있던 대로 그 종이는 지도였는데 무척이나 복잡한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낀 코마는 일단 지도를 내려놓고 물품들을 점검했다. 금화 주머니 안에 있던 나침반을 찾아내서 손에 쥔 코마는 곧이어 고개를 갸웃했다.

“망토는 어디에 있는 거지?”

편지엔 망토 역시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주위엔 망토 같은 건 없었다. 낡은 보자기 안에도 딱히 천조각은 ……보자기?

“켁. 이게 망토라고?”

먼지가 풀풀 쌓인 낡은 보자기가 실은 자신의 망토라는 걸 안 코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별 수 없는 일. 약간은 쌀쌀한 날씨 때문에 입고 있는 옷만으로는 역시 좀 불안한 감이 있어 망토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충 몇 번 털어 먼지를 제거하고 몸에 둘렀다.

“자, 그럼 출발해 보실까. 이런 숲속에서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고.”

코마는 조심스럽게 전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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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사라진 얼마 뒤, 코마가 사라진 곳과 다른 방향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공터에 들어선 그는 천천히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하얀 백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노인은 주름진 얼굴을 들어 공터를 살펴보았다.

“거긴가.”

공터 가장자리로 시선을 옮긴 노인의 눈빛이 변했다. 그곳으로 다가간 노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마치 벽이라도 있는 양 허공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몇 차례 헛손질을 한 끝에 마침내 지팡이가 무언가를 찾아냈는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원형의 거울 같은 것이 공중에 나타났다. 거울의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혀를 찼다.

“벌써 전송되었나, 한 발 늦은 모양이군.”

노인이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두르자 거울은 바람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더 공터를 탐색한 그는 이윽고 코마가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은 한숨을 푹 쉬고 흔적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구구 허리야.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칠순이 다된 노인네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키는지 원. 여기까지 들어오는 것도 한세월이었는데 언제 또 쫓아간담.”

노인의 장탄식은 바람에 실려 숲 너머로 금세 달아나 버리고 공터에는 다시금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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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땅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코마는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하나 더 셌다. 그리고 몸을 뒤집어 발라당 누운 뒤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출발은 기운차게 시작했지만, 웬만큼 활기찬 사람이라도 한나절 사이에 여덟 번을 넘어지고 나면 있던 기운도 쭉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어차피 무슨 기한이나 목적이 있는 여행길도 아니었으니(물론 가지고 있는 식량의 양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숲을 빠져나가야겠지만) 조금 누워서 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한 코마는 오늘의 세 번째 휴식을 만끽했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숲을 빠져나가기는 힘들겠네.’

벌써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서 코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보다 숲을 벗어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숲 자체가 상당히 드넓은 것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코마 자신이었다.

지도의 복잡한 기호는 예상과는 달리 쉽게 해석할 수 있었기에(이 부분에서 코마는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나침반을 이용해 길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길을 따라 움직여야 할 자신의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탑승한 로봇을 조종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이 때문에 이 한나절동안만 벌써 여덟 번이나 넘어진 것이다. 자꾸 넘어지다 보니 걸음을 옮기는 것도 자연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덩달아 이동속도도 느려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익숙해지는 느낌이어서 넘어지는 횟수도 줄어들고 다음으로 넘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도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 반작용인지 넘어질 때마다 느끼는 고통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지만. 여하튼 이런 사정 때문에 하루 만에 산자락으로 내려가기는커녕 숲 한가운데에 발이 묶여 꼼짝없이 야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코마는 원망스레 하늘을 한 번 흘겨본 뒤 몸을 일으켰다. 이미 체력도 상당히 소진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걸음을 재촉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직까진 크게 상처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그렇게나 넘어졌는데 별로 상처가 없다니 보기보다 튼튼한 몸이라며 코마는 스스로의 몸에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밤중에 숲속에서 발을 잘못 디뎌 구덩이에라도 떨어지면 다친다는 말로는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날씨도 제법 포근했기에 망토를 덮고 잔다면 노숙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새삼 망토를 가져온 자신의 결정을 칭찬하며 코마는 잠잘만한 곳을 물색했다.

생각 외로 편안한 잠자리가 될만한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한참의 시간을 소비한 코마는(걸어가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기에 먼 거리를 둘러보지 못한 것도 시간을 소비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간신히 조그마한 공터를 발견했다. 공터라기보다는 나무 사이사이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을 것 같지만 호칭이야 어떻든 간에 사람이 한두 명 들어가 잠을 자기엔 충분해 보이는 넓이였다. 화색에 차 그곳으로 발을 디딘 코마는 바로 맞은편에서 거의 동시에 들어선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라 한참을 응시하던 둘 중 상대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이런 깊은 숲속에서 누굴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설마 예쁘장한 미소년을 만날 줄이야. 이 근처에 키란이 관심 가질만한 유적지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코마는 남자가 내뱉은 단어들의 홍수에 휩쓸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저 남자가 말하는 ‘예쁘장한 미소년’이 자신을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것 외에도 키란인가 뭔가 하는 호칭으로 부른 것 같지만 전혀 모르는 단어였기에 일단 넘겼다.) 사실 정신을 차린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질 못했으니 미소년인지 추남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저 남자의 말에 의하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긴 한 모양이었다.

코마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남자는 먼저 공터로 들어가 나무뿌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코마도 더 이상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라 서둘러 남자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인사에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이어 자신을 덮쳐오는 기묘한 감각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울려 퍼지는 진동이 코마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코마는 그 파동에 휩쓸려 정신없이 표류하는 와중에 이 진동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내면으로 귀를 기울여 보니 처음엔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던 진동이 점차 그 세기를 키워가면서 그 내부에 숨겨진 어떤 규칙성이 느껴졌다. 코마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진동은 점점 거세져 이제는 몸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동은 코마의 몸을 뛰쳐나와…….

“괜찮습니까?”

순간 코마의 의식이 다시금 밖으로 돌려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코마의 앞까지 걸어와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석고상마냥 굳어져 있던 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여차하면 반쯤 도망갈 생각으로 발을 슬쩍 빼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자신을 걱정해준 사람에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이 표정변화 덕분에 남자의 얼굴에 더욱 더 걱정의 색이 짙어졌지만 가까스로 웃음을 수습한 코마는 남자에게 괜찮다는 말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다시금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신, 판소 회원이군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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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오른손이 품속으로 들어가 단검을 뽑아들었다.

코마의 오른손이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남자는 뽑아든 단검으로 코마의 왼손에 들린 칼집을 노렸다.

코마는 칼집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남자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남자는 허공을 가른 단검을 역수로 쥐고 왼손을 품에 넣었다.

코마의 오른손이 칼집에서 칼을 반쯤 뽑아냈다.

남자가 오른손의 단검을 코마의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코마는 칼의 옆면으로 단검을 막으며 칼을 완전히 뽑아들었다.

남자의 왼손이 또 다른 단검을 쥐었다.

코마는 왼손에 칼집을 오른손에 칼을 들고 물었다.

[어느 쪽을?]

코마의 왼손이 번개처럼 칼집을 휘둘러 남자의 턱을 후려갈겼다.

코마는 단검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나서야 자신이 칼을 빼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이어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남자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간단하게 무력화시킨 코마의 신기에 가장 놀란 것은 코마 자신이었다. 반쯤 얼이 빠져 칼과 자신의 몸을 번갈아 보고 있는 코마에게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당신…… 뭐야?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남자는 코마에게서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래도 턱을 제대로 맞은 듯 이내 엉덩방아를 찧었다. 코마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엔 커다란 당혹감과 그에 못지않은 공포감이 서려 있었다.

“저는…….”

설명을 하려던 코마는 곧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도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 눈을 뜬 건 오늘 아침에 불과하고 그 외에 어떤 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것저것 떠올리려고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세 번째 넘어진 뒤로는 혹시 딴생각을 많이 해서 넘어지나 싶어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끙끙대던 코마는 일단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소개했다.

“전 코마라고 합니다. 음 사실 정신을 차린 건 오늘 아침이라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제가 누워 있던 곳에 같이 놓아져 있던 종이에 의하면 제가 20번째로 이 판소 표준 세계라는 곳에 넘어온 사람인 것 같아요. 당신의 정체를 맞춘 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군요.”

떠듬떠듬 내뱉는 코마의 자기소개를 멍하니 듣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턱을 맞은 충격은 그새 제법 가신 듯 이번에는 크게 무리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아직 약간 어지러운 듯 일어나자마자 조금 휘청거렸지만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는 남자를 보며 코마는 내심 긴장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마를 단칼에 죽일듯한 기세로 공격했고 비록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떨어트렸지만 코마의 감은 그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단검을 더 가지고 있을 거라 알려주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코마의 설명을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으나 결국 코마의 설명을 신뢰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같은 판소 회원이신가보네요. 갑자기 공격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제가 요즘 좀 예민한 상황이었는데 누가 갑자기 제 정체를 꿰뚫어 보기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아뇨, 더 이상 공격할 의사 없으시다면 됐습니다.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이고 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무척 놀라긴 했습니다만 이런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제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분과 이런 식으로 틀어지고 싶지는 않군요.”

코마는 손을 내저었다. 스스로 한 말대로 서로 큰 상처도 없는 - 물론 남자는 코마가 냅다 휘두른 칼집에 턱을 맞았지만 - 마당에 굳이 더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상대 쪽에서 별달리 적대하려는 의사가 보이지 않았기에 이쯤에서 화해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코마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저…… 그러니까 성함이?”

“카루입니다.”

“예, 카루님.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코마의 물음에 카루는 약간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음 일단은 희망협곡을 넘어 하이란 공국 쪽으로 갈 생각입니다만…….”

코마는 카루가 말한 지명이 대체 어디를 말하고 있는 건지 당연히 몰랐다. 하지만 애초에 카루가 어디를 목적지로 삼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혼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코마는 잽싸게 카루에게 들러붙었다.

“그럼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안 그래도 아는 것 하나 없이 산을 내려가기가 불안했는데 카루님이랑 같이 다닐 수 있다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카루는 올 것이 왔다는 감정과 곤혹스러워 하는 감정을 반반씩 섞은 표정을 지었다. 코마로써도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었다. 인적도 드문 산속을 동료도 없이 혼자 헤매고 다닌다는 것은 코마에게 알리지 않은 목적이 있든지 아니면 이런 곳으로 이동해야 할 만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게 뻔했다. 당연히 코마의 동행은 꺼려지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선 첫 만남에서 초면인 코마에게 칼을 먼저 휘둘렀다가 격퇴 - 코마가 조금만 더 흐름에 몸을 맡겼다면 격퇴 대신 작살이나 절명이란 단어를 써야 했을 정도로 - 당한 카루인 만큼 이런 코마의 요청을 거부하기엔 아무래도 입장이 약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까지 동행하도록 하죠.”

결국 카루는 조건부 승낙을 했다. 코마는 약간 아쉬웠지만 더 매달리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 산 아래로 가자마자 바로 헤어지더라도 그동안 배울 수 있는 걸 최대한 배워둔다면 그래도 혼자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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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나 같은 걸 키란이라고 부르는구나.”

“사실 확실하지는 않아. 키란족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거든. 다만 전해 듣기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키란족들은 너처럼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널 처음 본 순간 아 키란족이구나 하고 짐작한거지.”

코마와 카루는 어느덧 제법 친해져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처음엔 서로 어정쩡하게 존댓말을 했지만 하룻밤 동안 노숙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된 것이다. 둘 사이의 나이대가 비슷해 보였고 - 카루는 그렇다 쳐도 코마는 자신의 나이를 잘 몰랐지만 어쨌든 생긴 건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의 모습이었다. - 언제까지고 존댓말을 하고 다닐 순 없지 않겠느냐는 코마의 제안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가만. 말하고 보니 정말 네가 키란인지 헷갈리네. 코마, 너 원래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어?”

“좀 전까지 내가 키란인 줄도 몰랐는데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을 어떻게 알아? 아니 애당초 키란의 본모습은 어떤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코마의 말에 코마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그렇지? 나도 이 조그만 몸이 2m가 넘는 늑대인간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잘 상상이 되 않으니까 말이야.”

코마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늑대인간? 키란족은 늑대인간이야?”

“어, 내가 말 안했던가? 사실 같은 종족 내에서도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라서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키란족은 2m에 가까운 키를 가지고 있는 늑대인간의 모습인 경우가 많아. 물론 우리가 아는 늑대인간과는 달라서 그냥 얼굴 생긴 게 늑대와 비슷하다는 의미지. 그나마도 자기네들 부족마다 생김새가 달라서 어떤 키란들은 여우나 고양이에 가깝게 생긴 자들도 있다고 하더라.”

코마는 자신의 작달막한 몸이 사실은 2m가 넘는 거구 - 물론 카루의 말이 맞는다는 전제하에서겠지만 - 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코마는 당혹감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거의 익숙해진 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원래모습으로 변신하는 건데? 역시 보름달을 봐야 한다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늑대인간이랑은 다르다니까. 아, 보인다.”

코마는 카루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야트막하게 이어지던 경사로는 어느새 끝나 있었고 드넓은 숲과 그 끄트머리에서 조그마한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한참 멀었네.”

“오늘 오후쯤이면 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이 앞으로는 딱히 험한 길도 없고 말이지.”

카루가 앞장서서 내려갔고 코마는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마냥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나저나 어째 좀 덥네.”

“당연하지. 여긴 자이나밀림이라고. 산맥이랑 가까운 곳은 그럭저럭 시원한 편이지만 여기까지 오면 이제 서서히 날씨가 따듯해지는 거야.”

“밀림이라고?”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안 것만큼이나 놀라운 말을 들은 코마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위엔 커다란 활엽수들이 여기저기 그 높이를 뽐내고 있었지만 흔히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야자수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도 세계가 달라서 그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코마에게 카루가 덧붙여 설명했다.

“일단 밀림이라고 통칭하고 있지만 원체 넓은 곳이어서 자세하게 파고들면 천차만별이야. 여기는 밀림 북쪽 끝부분인데다 세르나 산맥과 가까워서 열대라기보다는 온대에 가깝지. 하지만 저 남서쪽 동자이나강 너머의 제국령 밀림지역은 전형적인 열대기후라서 찌는 듯한 더위는 기본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우가 쏟아지곤 한다더라.”

코마는 카루의 박식한 모습에 감탄의 시선을 던졌다. 카루는 코마보다 한 3년 정도 일찍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데 그 3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새삼 느껴지는 코마였다. 코마의 종경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카루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아니, 뭐 직접 가본 건 아니고 풍문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아직 못가본데가 너무 많아. 지금부터 하나하나 가본다고 해도 몇 년이나 걸릴지 모르지.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도 있고.”

“그래도 그만큼 알고 있는 게 어디야. 난 인제 막 여기 떨어졌는데 아는 건 고사하고 내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큰일인데.”

코마는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카루는 코마와 달리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의 기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판타지소설☆★’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활동하던 중 채팅방에서 모종의 제의를 받고 승낙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판소 세계에 들어와 있더라는 것이다. 코마가 받은 것과 같은 짧은 편지와 함께.

“너무 상심하지 마. 시간이 지나다보면 기억도 돌아오겠지. 지금은 조급해하지 말고…… 응?”

코마를 위로하던 카루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안내자인 카루가 멈췄으니 뒤따르던 코마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마는 갑자기 멈춘 카루를 향해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왜 그래?”

“이상한 나무네. 이렇게 생긴 나무는 처음 보는데…….”

카루는 길 옆 숲속에 있는 한 나무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무는 일단 생긴 건 다른 나무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줄기부터 가지, 잎사귀 하나하나까지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일까. 코마는 나무로 걸어가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칼집으로 툭툭 쳐보기도 했다.

“신기하네. 생긴 건 나무인데 감촉은 돌에 가까운 걸. 이런 나무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

“글쎄, 나도 본적이 없는 나무라서…… 가만, 돌?”

고개를 흔들던 카루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표정에서 떠오르는 희미한 불안감이 코마까지 덩달아 불안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밀림 외곽의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숲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이 종종 나무, 짐승, 심지어 사람의 모양을 한 돌을 발견하곤 한다고. 사람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 존재를…….”

“어머, 젊은 오빠들이 이런 숲속엔 무슨 일?”

“……밀림의 악마라고 부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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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와 카루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사이에서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 풍성한 금발과 갸름한 얼굴은 허름한 옷을 뚫고 그녀의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왼손엔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지팡이로 쓰기엔 너무 짧고 가는 게 그냥 들고만 있는 모양이었다. 카루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네요 하하.”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로, 흐린데?”

“…….”

카루, 격침.

“마을 사람이신가요?”

보다 못한 코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오히려 되물었다.

“마을? 음, 마을이라면 그 살아있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을 말하는 거지? 근처에 마을이 있어?”

비록 좀 험하긴 했지만 눈앞에 마을로 가는 길이 멀쩡하게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마을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처음 만난 코마 일행에게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그녀의 태도는 사실이리라. 일행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여자는 둘을 계속 보챘다.

“응? 말해 줘. 어디로 가야 마을이 나오는 거야?”

“어, 이 길을 쭉 따라가시면 나옵니다만.”

코마는 계속된 재촉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에 더 곤혹스러워 했다. 비록 키가 보통 여성에 비해 제법 크고 성격이 좀 호탕해 보이기는 하지만 상대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여성이었다. 토끼 한 마리 잡는데도 애로사항이 꽃필 듯한 여성을 숲 속에서 만났을 때 근처의 마을을 가르쳐 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권장되었으면 되었지 비난받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그녀를 대하는데 있어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그저 묘한 타이밍에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는 눈빛 때문일까.

“아하, 알았어. 가르쳐 줘서 고마워. 오빠 참 친절하구나?”

여자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는 카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황한 카루가 손에 낀 장갑을 벗으려 했으나 여자는 그 전에 양손으로 카루의 왼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좀 전까지 여자에 대한 묘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카루였지만 이렇게 미인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니 경계심이고 뭐고 얼굴이 저절로 헤실 거리기 시작했다. 코마는 자신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남자란 참으로 슬픈 …….

[위험!]

“안 그래도 요 근래 살아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숲 속에서 곰이나 늑대 같은 네 발 달린 녀석들을 잡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더라고.”

“아, 예…… 예?”

[경고!]

“어라, 그러고 보니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라? 두 발로 걷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음……. 손을 쓰던가?”

“대, 대부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적성개체의 이능력 발현을 감지!]

“흐음, 그렇구나. 여하튼 고마워. 난 이 길로 마을에 가볼게.”

“아,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함께 가시는 게 어떨까요? 생각보다 거리가 멀거든요.”

“고맙지만 됐어. 머뭇거리다가 다들 도망 가버리면 어떡해? 전에도 그러다가 한 명 놓쳤단 말이야.”

[전투정보…….]

‘그만!’

코마는 서서히 정신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급히 떨쳐냈다. 여자가 카루의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의 정신을 강타한 이 소리에 휘청 이던 코마는 어느새 칼자루 위로 올라가 있는 오른손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저 여자를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저 뒤숭숭한 대화 말고는 딱히 어떤 특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여자에게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는 것은 아무리 본능(?)의 속삭임이라도 주저될 수밖에 없었다. 코마가 혼자 갈팡질팡 하는 사이, 여자는 카루의 손을 놓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코마는 결심을 굳혔다. 그로써는 이 무의식적인 대응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 판소계에 도착한지 하루도 되지 않았을 무렵 자신이 카루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고 그의 공격을 가볍게 무력화 시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능력 덕분이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뒤, 코마는 조용히 칼자루를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그래, 어디 한번 원하는 대로 날뛰어봐라.’

코마의 머리 안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위기상황 인식. 잠재능력 각성수치를 증가시킵니다.]

[특수능력 검색. Lv 1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전투정보관제 시작.]

마치 머릿속에 잠겨진 문을 열어젖히는 느낌이 코마의 온몸을 관통했다. 그 짜릿한 느낌에 몸을 떤 코마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황금빛 광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코마는 카루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코마의 모습에 그의 눈치를 살피던 카루는 코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위압감이 코마의 눈에서 쏟아져 나와 카루를 짓눌렀다. 억지로 호흡을 이어나가면서 카루는 코마가 키란족일 거라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코마의 두 눈은 늑대가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그것이었다.

“왜, 왜 그래?”

“손.”

“어?”

“왼손 보여줘 봐.”

갑작스런 요구에 카루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코마는 카루의 왼손을 낚아채 코앞으로 가져왔다. 그의 행동을 따라 시선을 자신의 왼손으로 옮긴 카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가 끼고 있던 장갑이 어느새 회색빛 돌덩이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혼란에 빠져 있는 카루를 두고 코마는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여자는 그 사이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해 있었다. 키가 크다 보니 보폭도 큰 걸까, 코마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각을 머리 한편으로 밀어내고 낮게 으르렁 거렸다.

[멈춰.]

뱃속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듯한 울림이 코마의 목을 타고 숲을 울렸다. 카루는 코마가 그대로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박살난(?) 경험으로 볼 때 정도의 차이는 그 때와 하늘과 땅 수준으로 다르지만 어쨌든 코마가 저 여자를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과연 성난 늑대의 공격을 그녀는 단 1초라도 견딜 수 있을까? 코마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의 살기가 여자의 등을 관통하는 순간,

여자의

걸음이

멈췄다.

“……나 끈덕진 남자는 싫어하는데.”

“끈덕져서 미안한데, 하나 꼭 묻고 싶은 게 있어. 당신, 혹시 밀림의 악마라고 들어봤어?”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어딘가 뻣뻣한 느낌이었다.

“글쎄, 그런 호칭을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보다 말이야.”

여자는 천천히 일행을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머리가 서서히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칼이라도 되는 양 일행을 향해 겨눴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가지는 밑에서부터 서서히 본래의 빛을 잃고 굳어가기 시작했다. 덧칠이 거의 가지 끝에 이르렀을 때 쯤, 여자가 샐쭉 웃었다.

“너희, 살아있는 사람?”

코마의 칼이 세상으로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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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놈. 잡히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을 테다.”

공터에서부터 코마의 추적에 나선 노인은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대상과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노인은 그 원인이 자신의 노쇠함에 있다고 인정하는 대신 상대의 버르장머리 없는 빠름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판단은 자연스레 대상에 대한 분노로 승화되었다.(실제로 코마는 몸을 움직이는데 적응하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참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성대한 욕설을 퍼붓고 있던 노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판소 회원끼리의 분쟁인가?”

노인은 혹시 이 근처에 존재하는 판소 회원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최근 1, 2년 사이 판소 회원들이 여럿 넘어온 터라 일일이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근처엔 판소 회원이 얼마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느껴지는 판소 회원의 기척만 셋이었다. 노인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자신이 한 발 늦은 게 생각이상으로 큰 실수인 모양이었다.

“넘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싸움박질인가 그래.”

노인은 둔한 자신의 발을 다시금 재촉했다. 이번엔 늦지 않기를 내심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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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손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은 촉촉한 수분을 머금기는커녕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차디찬 돌덩이로 변해버리고 있었다. 정글의 악마는 갓 세상에 나선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죽음의 변주곡을 연주했다. 그녀 주변의 그 무엇도 감히 자신의 생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늑대에겐 그 모든 것이 닿지 않는다.

여자의 화사한 미소도, 그녀의 나풀거리는 요사스런 머리칼도, 그녀의 양 손끝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죽음의 비명도 무엇 하나 코마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코마는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여자의 손길이 닿기 반 박자 앞서 움직이며 그녀의 음악에 끊임없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적성개체의 이상능력 해석 완료. 발현지점은 개체의 양 손으로써 직접적인 접촉, 혹은 떨어져 있는 목표에 대한 직선적인 투사를 통하여 대상을 경화시킴. 해제방법 불명. 능력이 미치는 범위는 발현지점을 중심으로 2.5~3.5m에 해당. 손을 제외하고도 안구 등에서 능력이 발현될 가능성 57%.]

1분 1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코마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코마는 전해져 오는 정보에 맞춰, 여자의 능력이 발현되는 경계의 안팎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상대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조그만 게 자꾸 촐랑촐랑 피하기만 하기는!”

여자는 코마의 흔들기에 영향을 받아 점점 평정을 잃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휘두르는 손길이 거칠어지고 움직이는 폭도 커졌다. 상대가 평정심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여전히 빠르고 위협적이었기에 코마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대치상황이 이어질 뿐이었다.

‘강행돌파를 할까, 아니면 한 발 물러설까.’

코마는 조용히 여자를 주시하며 고민했다. 조금 더 상대를 흔들어 놓은 뒤 빈틈을 노려 안으로 파고들지, 아니면 일단 물러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할지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을 봤을 때 참을성이라든가 계략이라든가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보였지만 그래도 비장의 한수를 숨겨두고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가령 앞서 언급되었던 대로 눈으로도 석화빔(?)의 발사가 가능하다든가 자신의 능력범위를 일부러 좁혀 사용하고 있다던가 하는. 만약 그녀가 코마가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를 아직도 숨기고 있을 경우 지금 그녀의 간격으로 파고들어가는 행위는 무척 위험한 것이었다.

결국 코마는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하고는 움직임을 바꿨다. 어떻게든 안으로 파고들려던 몸을 뒤로 빼며 조금씩 원을 크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멀어지던 코마는 어느 순간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코마의 빠른 움직임을 경계하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여자는 코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쭈, 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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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는 코마와 여자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싸움이 벌어진데다 조금 전 여자가 왼손 장갑을 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손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 낑낑거리며 굳어버린 장갑에서 손을 빼내려 애쓰던 카루는 겨우 왼손을 장갑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갑자기 어깨를 짚는 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익!”

“쉿. 들리겠어. 몰래 빠져나온 거란 말이야.”

“코마 너였냐…….”

카루는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등을 나무에 기댔다.

“우리 이쯤에서 그냥 물러나는 게 어때? 굳이 상대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같은데.”

“밀림의 악마를 이대로 보내자고?”

“밀림의 악마고 밀림의 악어고 간에, 우리한테 별다른 해를 끼치지도 않았잖아? 그냥 가던 길 가라고 하고 슬슬 빠지자.”

“해를 안 끼치긴. 저 여자 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 마을 사람들을 사냥감이라고 하잖아. 그대로 놔두면 우리가 마을에 찾아갔을 땐 사람이 아니라 석고상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카루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좀 전에 사냥감이 어쩌고 하는 상당히 뒤숭숭한 말을 저 여자가 하긴 했었다. 코마는 빠른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보다 이 상태론 끝이 없겠어.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확실하게 제압이 힘들 것 같으니 둘이서 덤비자.”

“둘? 나도 싸우라고?”

“응. 굳이 맞서 싸우진 않더라도 그냥 시선만 살짝 끌어줘. 저쪽 석화능력은 의외로 그리 범위가 넓지 않아서 손에 직접 닿거나 아니면 3m정도만 떨어져 있어도 석화될 염려는 없어. 그러니까 좀 멀리서 시선을 끌어주면 내가 뒤통수를 칠게.”

카루는 잠시 코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황금빛이 감돌고 있는 그 눈은 자신만만했다. 적어도 자신을 방패막이로 쓰고 그 사이 도망칠 심산은 아닌 것 같았다. 카루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코마가 갑자기 그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땅바닥에 엎어진 카루는 항의를 하려고 고개를 들다가 무언가 기다란 침이 자신의 위로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척 가늘어서 자세히 봐야 그 모습을 알 수 있는 침은 조금 전 카루의 머리가 있던 위치를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코마가 조금만 움직임이 늦었다면 지금쯤 카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 모아 석화시킨 건가.”

침을 자세히 살펴보던 코마가 질린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귀로 여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라…… 빗나갔나? 뭐 상관없어. 거기 있지? 얼른 안나와? 싸움 거는 건 네 맘이지만 끝낼 때는 아니란다는 말, 몰라?”

그녀의 말에 카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등 뒤로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카루는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몸 성히 도망치긴 그른 모양이군. 좋아. 내가 먼저 공격을 할 테니까 넌 주변에 있다가 기습을 해.”

“어? 덤비려고?”

“기왕 도우는 거 확실하게 도와야지. 남의 머리통에 바늘을 꽂으려고 하는 저 괘씸한 녀석한테도 복수를 해야겠고.”

코마는 잠시 주저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여자는 그들이 숨어 있는 나무로 다가오고 있었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알았어, 금방 도울 테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

“그래, 아 참.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카루는 몸을 일으키는 코마를 올려보았다.

“뭔데?”

“아아, 시선을 끄는 건 좋은데, 별로 내가 쓰러뜨려도 상관없는 거지?”

카루의 눈빛에 독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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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상대가 숨어있다고 생각되는 나무로 걸어가다 흠칫 멈췄다. 나무의 양 옆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튀어 나왔던 것이다. 오른편으로 튀어나온 코마는 그 기세로 숲 속으로 다시금 뛰어들었다. 여자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좀 전에 사라졌을 때처럼 무수한 낙엽들 사이로 스며들어간 코마의 작달막한 체구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코마의 추적은 뒤로 하고, 여자는 나무 왼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카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머, 진작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네?”

“만난 진 얼마 안됐지만 그래도 여행친구를 버리고 갈만큼 매몰차지는 못해서 말이지.”

“흐응. 그래서, 덤빌 생각?”

카루는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살짝 낮췄다. 그의 양 손엔 품속에서 꺼낸 두 자루의 단검이 역수로 들려 있었다. 여자는 짧게 코웃음 치고 전혀 주저 없이 카루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루는 거의 모든 신경을 여자의 늘어뜨린 양손에 집중시킨 채 마른침을 삼켰다.

‘3m 정도가 사정거리라고 했지.’

카루는 조금 전 코마가 해준 설명을 되뇌었다. 그리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는 공방 만에 어떻게 상대의 간격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자신을 상대로 보여준 그 귀신같은 움직임은 그의 말에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 거리면 상대의 눈 깜빡하기 전에 벨 수 있다.’

카루 역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주변을 가득 메운 가운데 점점 가까워지던 둘 사이의 거리가 어느덧 코마가 경고한 3m에 다다르자, 여자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그 양 손바닥을 카루에게 겨누었다. 그녀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없는 승리의 미소가 피어오르는 그 순간,

카루의 오른발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칼이 먼저 공간을 찢고

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일섬(一閃)」

카루의 신형이 여자의 5m 뒤에서 나타난 것과 여자의 움츠러든 양 팔에서 불꽃이 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