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간의 휴전
極劍
1.
"일병 디미트리 페트렌코! 이병 레프 크라브첸코! 이병 니시타 드라고비치‥‥."
니미럴, 오늘 운수도 별로네. 아침부터 불발탄이 갑자기 터져서 사람 심장을 덜컥 내려앉히질 않나, 게다가 또 아침은 여전히 딱딱한 검은 빵에 물도 허여멀건게 들어있질 않나, 또 눈은 왜 이리 펄펄 오노. 선임하사님도 나에게 이런 일은 또 왜 시켜 가지고 미치겄네 정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안대를 매고 결박당한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병사들을 애써 외면했다.
"너희들은 조국을 위해 싸워야할 의무를 저버리고 탈영이라는 중죄를 범하였다. 너희들의 죄의 대가는 당연히 총살형이다! 하지만 너희들의 명예를 고려해 통보에는 '전사'라고 쓰여질 것이다!"
아무 거리낌없이 사형을 선고하는 소대장. 그에 반응하듯 와들와들 떨고 있던 병사들의 동작이 더욱 맹렬해졌다. 어떤 이는 심지어 '아버지'를 외치면서 애타게 울부짖었다. 젠장, 못들어주겠네.
"사수들 집총!"
벼락 같이 터지는 소대장님의 외침에 나는 화들짝 놀라 총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울부짖음.
"조준!"
나는 총구를 들어 나의 앞에 있는 소년을 겨누었다. 안대는 눈물 때문인지 축축히 젖어잇었고, 그 아래로 콧물과 침이 땟국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에 길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딱 봐도 앳되어 보이는게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어린 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대장님의 외침.
"발사!"
젠장, 이 짓은 정말 못해먹겠어. 나는 그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길 바라면서 총구를 심장 쪽을 겨냥하였다.
'다음 생에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태어나지 말라고.'
방아쇠를 당기며 든 생각이었다.
2.
3년. 전쟁이 발발한 후 지난 날짜였다. 작대기로 그으면 무려 1095개나 된다. 막사의 한 면을 채우고도 남을 양이로군.
어쨌든 지난 3년 동안 저 지긋지긋한 제국Kaiserreich 놈들은 그 망할 제국주의를 앞세운채 아국을 침범하였고 우리는 국경인 아르바체프-하바로프스크 라인에서 밀려나 벌써 수도까지 밀린 상황이었다. 물론 우리는 아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방패, 동장군의 위력으로 겨우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국놈들도 따뜻한 곳에 있다가 북진하면서 밀려오는 이 지옥같은 추위에 도저히 올라올 엄두를 내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제국은 비록 북진은 포기하였으나, 현재 우리가 구축한 전선에서 간간히 도발을 해오고 있었으니까.
───펑!
바로 지금처럼!
"야! 어딜 겨누는거야! 저쪽이야 저쪽!"
"안돼, 그쪽으로 가지마! 야! 미쳤어! 야! 임마!"
"젠장! 야! 탄약을 만들어서 오냐? 빨랑 안 가져와?!"
‥‥아비규환이 따로없다. 제국놈들이 쏘는 포격이 참호 곳곳에 직격하여 비산하는 파편이 내 머리 위까지 튀었다. 고개를 내밀려고 하면 어디있는지 모를 망할 저격수 놈이 우리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
풀썩──!
젠장! 또 한 명이 당했다! 나는 고개를 움츠리면서 속으로 씨발씨발 거리면서 제국놈들을 열심히 씹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참호 안에서 웅숭그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씨발! 대체 아군의 지원은 언제 온답니까?!"
"지금 아무리 무전을 쳐도 연락이 안됩니다!"
적들의 공격이 평소의 예상 수위를 훨씬 뛰어넘자 다급해진 것은 우리였다.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쪽에서도 간간히 박격포와 고사포를 날리고 있었지만 저쪽에서 쏟아붇는 물량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쾅!
씨발!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멍멍한 귀를 어루만지면서 몸은 엄폐한채, 손만을 참호 밖으로 내놓고 총을 쏴댔다. 하지만 이 눈먼 난사에 맞을 적군이 있을리가 없었다. 약간의 저항을 끝마친 나는 재빨리 다시 웅숭그렸다.
"‥‥어, 어?! 저게 뭐야?!"
겁도 없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참호 밖을 내다보던 이등병이 입을 쩍 벌리면서 소리쳤다. 뭐야 저 녀석, 뭘 봤길래 저래? 전쟁터에서 엔간히 놀랄 일도‥‥에헥?!
덩달아 고개를 들고 참호 밖을 내다본 나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뭐지 저거?"
서로의 폭격이 미치지 않는 중립 지대, 평소라면 그 곳은 포격이 잠깐 멈춘 시간에 달려오는 적병으로 가득할 그곳은 텅 비어있고, 오직 육중해 보이는 5개의 쇠뭉치가 있었다.
보기에도 무게가 상당히 나갈 것 같은 그것은 지금까지 보던 어떤 것들과도 다른 이형의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양 옆에 있는 두 개의 널널하게 덧대어진 철판 옆으로 돌아가는 캐터펄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쇳덩이 가운데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기관총의 총구였다.
─── 피융!
"흐익!"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날아온 총알이 내 철모를 튕겨버리자, 나는 기겁하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옆에 같이 엎드려있는 선임하사님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선임하사님! 전방에서 5개의 괴물이 돌격해오고 있습니다?!"
"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괴물이라고?!"
"그, 그게 쇳덩이로 된건데‥‥. 하여튼 느낌이 안 좋습니다!"
나의 보고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선임하사님은 어디 한번 보자는 표정으로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미셨다. 그리고 경악한 표정이 되어서는 옆의 무전병을 닥달해대기 시작했다.
"망할! 야! 전차다! 전차야! 빨리 포격 요청해! 포격!"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밀어 저 '전차'라고 칭해지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벌써 우리 철조망 부근까지 와있는 그것. 어‥‥어‥‥저거저거?!
"씨, 씨발! 저게 철조망을 뭉개고 들어옵니다!"
"‥‥망했다."
내 보고를 들은 선임하사님은 사색이 되어서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것'의 양옆에 있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드르르르르르륵──!
기관총 특유의 기음이 들려오고 총격에 파인 바닥에서 비산한 파편이 참호 안으로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떨구고 웅숭그렸다.
"‥‥씨발! 야! 후퇴 명령 안 떨어지냐?!"
역시 내 옆에 같이 웅크리신 선임하사님의 절망 섞인 외침에 무전병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전기에 대고 뭐라뭐라 외치던 무전병은 곧 얼굴에 희색이 돌아왔다.
"‥후퇴! 후퇴명령 떨어졌습니다!"
"그래?! 야! 그럼 서둘러! 얼른 튀자! 저 괴물 새끼들이 오기 전에!"
역시 희색이 돌아와 참호 건너편으로 뛰어가는 선임 하사님은 그 어느 때보다 솔선수범하시고 계셨다.
3.
하 씨발 망할 것들. 칵 저주나 받아 뒈져버려라. 씨발,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삼년간 같이 굴러먹은 나를 버려? 선임하사님은 무슨 씨발. 상급자란 놈이 지 분대원도 챙기지 않고 말이야. 와나 이 망할 나라 같으니 그냥 콱 제국에 망해버려라.
나는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거세어진 눈발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 내 시야를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씨발, 망할 새끼들! 이 상황에서 버려두다니! 씨발! 나더러 죽으라는거야 뭐야!"
막막함 속에서 올라오는 절망감에 울컥한 나는 바락바락 소리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날카로운 칼바람만이 내 주변을 맴돌며 나에게 속삭일 뿐이었다.
넌 여기서 죽을거라고.
"죽긴 누가 죽어! 난 안 죽어! 안 죽는다고 망할 놈들아!"
씨발, 쓸데 없이 소리쳐서 그런가? 허기진 뱃속이 쪼르륵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나는 기운을 잃고 다시 비적비적 걷기 시작했다. 배도 고프지만 죽도록 힘들다. 벌써 허벅지까지 쌓인 눈은 이제 나에게 단 한걸음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 발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고, 그 차가운 냉기속에 갇힌 내 다리는 계속 내 뇌에 경고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다급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해가 지면 그나마 남아있던 방향감각마저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젠장,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지만 서서히 몸은 무거워져간다. 씨발,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벗어나서, 이 곳을 벗어나서 집으로 갈 것이다. 집으로 가면 옆집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는 예니가 나를 꼬옥 안아주겠지. 그리고 어머니는 양파와 당근과 감자를 갈아서 국물을 내고, 그리고 조미한 토끼고기를 퐁당 빠뜨린 특제 토끼 수프를 해주실 거야‥‥. 그리고 나는 따스한 벽난로를 쬐면서 추위를 녹이면서 어머니와 예니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겠지. 어머니, 제가 참호에서 돌팔매를 했는데 멍청하게 그곳을 지나던 토끼가 맞았지 뭐에요. 그래서 그 날 그 멍청한 토끼 덕분에 오랜만에 고기를 먹을 수 있었어요. 예니, 내가 투구에 넣어둔 네 사진을 동료들에게 보여줬더니 녀석들이 뭐라 하는줄 아냐? 오늘 내가 잡은 그 토끼 갔댄다, 토끼 크크. 그래서 내가 그 날부터 별명이 토끼 사냥꾼이 되었지 뭐야 크크크‥‥. 어, 아 왜 이리 졸리지? 예니? 어머니? 왜 그렇게 슬픈 눈빛으로 나를 보세요? 으음‥‥. 아 모르겠다. 일단 자야겠어. 모든 걸 내려놓고‥‥. 너무 피곤하다 오늘.
4.
눈을 떠보니 눈에 띄는 것은 희미한 조명등에 비춰진 투박한 천장이었다. 나뭇결이 그대로 보여지는 통나무로 차곡차곡 쌓여진 천장은 내게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햇다.
"‥꿈인가?"
포성, 빗발치는 총탄, 조금이라도 내밀면 죽는다, 쇳덩어리, 눈, 아아 기억이 뒤엉킨다.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잡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꿈이겠지, 꿈. 난 긴 꿈을 꾼거야. 제국이 왜 쓸데없이 이런 쓸모없는 땅으로 올라왔겠어. 자연환경 독하고 사람들도 독한 이런 곳에서 뭘 얻겠다고‥‥.
"오, 일어났는가?"
그 때 벌컥 열리는 문. 그리고 쏟아져내리는 불빛.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자리에 다시 눕혔다.
"허허, 쉬게나. 자네 지금 몸이 아주 안 좋아."
"누구십니까? 제가 왜 여기 있는거죠?"
노인은 나의 질문에 멈칫하더니, 곧 그의 손에 든 것을 내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나는 접시 위에 놓여진 귀리빵과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오트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밖에 지금 보랴가 불고있는데 겁도 없이 눈밭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더군."
노인이 먹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안 그래도 오트밀을 본 순간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어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나는 노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에 의해 사레가 들어버리고 말았다.
"컥, 컥, 쿨럭, 쿨럭. 뭐,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응? 눈밭에 대자로 누워있었다고‥‥."
"그 전에요!"
"보랴라고 했다만?"
보랴라니‥‥.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의 근육이 약간 삐걱거렸으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차륵!
창문에 달려있는 가림막을 걷은 나는 눈앞에 보이는 바깥 풍경에 할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휘오오오오오──── !
마치 포효하듯이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새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몇년에 한 번 몰아치는 이상 기상 현상인 보랴(буря)는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신의 분노라 표현되었으며 신의 잔상이 걷어진 현재에도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 보랴가 불면 눈이 사람만한 높이까지 쌓이며 그에 따라 발생하는 냉기 또한 이 지역 특유의 추위에 단련된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라 보랴가 부는 일주일은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위급 상황이 아닌 이상은 외출을 하지 않는다.
"보다시피 이렇다네."
입을 벌린채 멍하니 창밖을 보던 나는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겁니까?"
"어젯밤 눈보라 기억나나? 아마 그 때부터였던것 같네."
아직 하루도 안 지났다는 뜻인가. 막막해지는 기분에 저절로 이마가 짚어진다. 이 근처는 분명 제국놈들에게 점령되었을 것이 뻔할 뻔자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적지에 있는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짧아도 일주일은 여기서 발이 묶여야 한다는건가."
한가지 다행인건 적군들도 같이 묶인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어서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제 총이랑 방한복 어디있습니까?"
"창고에 뒀네. 그런데 그건 왜‥‥‥."
"떠나야 겠습니다. 돌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후일 사례하죠."
"아서게, 밖은 지금 나돌아다닐 수 없어. 게다가 자네 방한복은 묻어있던 눈이 다 녹아서 푹 젖어있네. 그걸 입고 나갔다간 자넨 십중팔구로 얼어죽어."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괜찮네. 내가 올해 보랴가 올줄 알고 식량을 엄청 쌓아놨네. 군식구 하나 늘어났다고해서 먹여살리지 못하겠는가?"
'지금 식량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왈칵 나는 겨우겨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노인이 다시 몸을 돌려 나가신 것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소리쳤다.
"영감님! 지금 상황을 모르시나 본데요‥‥!"
5.
우걱 우걱 우걱 우걱 우걱
"군대에서는 식사가 변변치 않은가?"
"우물 우물‥‥네. 쩝쩝‥‥꿀꺽, 이런 진수성찬은 정말 오래간만인걸요."
사실 진수성찬이라고 보기도 뭐했다. 호밀로 만든 검은 빵은 군대 내에서도 흔히 지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면 빵 안에 사우어크림이 들어있어 빵 속이 사르르 녹아내린다는 것이며, 게다가 겉표면에 고소한 버터까지 발랐다는 점에서 군대에서 먹는 그것과 비교해야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탁자 위에는 *트바로크와 **케피르가 얌전히 접시 위에 앉아있었고, 내 앞에는 당근과 감자를 갈아넣은 듯한 걸쭉한 붉은 수프가 자리잡고 있었다. 일반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식단이나 군대에서 뻑뻑한 야전식량, 그조차도 없으면 얼어붙어 딱딱한 호밀빵을 먹었던 나에게는 천국의 식탁이나 마찬가지였다.
"쯧쯧. 고생이 심한가?"
"예. 암‥‥쩝‥쩝. 아무래도 전쟁 중이니‥‥쩝쩝쩝‥."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호밀빵을 다 집어삼키는 동시에 식탁 가운데 놓여진 트바로크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쾅 쾅 쾅 ───────
처음엔 잘못 들은줄 알았다. 지나가던 바람이 장난으로 흔들고 지나간줄 알았지만, 두번째, 세번째 반복되자 나는 먹고 있던 트바로크를 내려놓았다.
"영감님‥‥‥."
"음?"
"혹시 무기로 쓸만한거 있습니까?"
"왜 그러는가?"
"‥‥‥손님이 온거 같아서요."
그러고보니 무기로 쓸만한게 내 손에 쥐어져 있었군. 빵을 자르는데 쓰는 빵칼을 집어든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문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로 손을 가져간 나는 마음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벌컥 ─── !
"뭐하는 놈들이야?!"
문을 열자 어마어마하게 강한 풍압과 함께 다량의 눈, 그리고 살을 에는듯한 칼날 같은 추위가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 묻힌 두 인영을 목격한 나는 빵칼을 제일 앞에 선 인영의 목에 겨누고 동시에 녀석의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
"뭐, 뭐야!"
나에게 잡힌 녀석은 흠칫 몸을 굳혔고, 총을 치켜든 녀석도 어지간히 당혹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새끼들‥‥제국군 놈들이 어디서 여길 싸돌아다녀!"
내 쪽으로 끌려온 녀석이 현관에 걸린 전구의 빛에 비춰지자 나는 이를 갈았다. 역시 예상대로 놈들은 제국군. 하얀색의 철모와 두툼한 방한복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이 놈의 소속을 여지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저, 적?!"
"이 새끼! 카를을 당장 놔줘!"
설마 이런데서 적을 만날줄은 예상못했다는 어투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이 근처가 놈들 천지란 얘기인가‥‥.
나는 표정을 굳히면서 빵칼을 잡힌 놈의 목에 들이댔다. 살은 에는 듯한 추위도, 이것은 고작 빵을 자르는 칼이어서 날이 무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에게 잡힌 이 녀석을 철저히 이용해야한다.
"총 버려. 그럼 목숨만은 살려준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당장 카를을 놔주라니까!"
"총 안버려? 그럼 이 자식 목줄 날아간다."
"네놈이야말로 이마에 구멍 뚫리고 싶어? 당장 안 놔줘?!"
골치아프군. 뜻때로 따라주지 않는 적병사놈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나는 빵칼을 조금 더 과감하게 들이댔다. 차가운 날이 느껴졌는지 녀석의 몸의 떨림이 좀 더 극명해졌다.
"너, 너 이 자식!"
"다시 한번 말한다. 총 버려, 이 새꺄!"
하지만 녀석은 총을 버릴 기색이 없어보였다. 씩씩 대면서 내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리듯 계속 총구를 내 머리쪽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녀석의 모습에 위협을 느낀 나는 좀더 칼날을 바짝 들이댔다.
그런 대치 상황이 얼마나 지났을까? 1초가 1년 같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갇힌 나와 녀석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면서 빈틈과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잊혀졌던 인물의 말에 바르작 깨져버렸다.
"뭣들 하는가, 식사시간에."
나무라는 듯한 어조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와 적병사들의 얼굴이 팩 돌아갔다. 그곳에는 우리들의 대치상황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태연하게 빵을 씹고 계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여, 영감님?"
나는 그런 그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하는 행동이 더 가관이었다.
"어여들 들어오게. 네들은 지금 춥지도 않은가?"
"‥‥‥."
지금 나와 마주친 저 저주받을 녀석의 표정도 나와 같으리라고 확신한다. 나와 녀석은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끼면서 서로를 황망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득 느껴지는 강력한 추위에, 일단 나와 녀석은 일시적인 휴전을 눈빛으로 교환했다.
"일단 들어와라."
나는 빵칼을 더욱 들이댄 뒤 녀석을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대치하던 녀석은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총구를 내쪽으로 계속 겨냥하면서, 한 손으로 슬슬 문을 닫았다.
덜컥
문이 닫히자 약간의 여운은 있었지만 벽난로의 열기 덕분에 추위가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녀석을 위협하기 위해 입열 열려 할 때‥‥.
"이봐, 보리스. 자네 더 먹지 않을건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말이지."
우물우물대며 경악스러울 정도의 태평함을 자랑하는 영감님 덕분에 열렸던 입이 닫혔다. 게다가‥‥.
꼬르륵 ───
망할, 이놈의 배는 그렇게 쳐먹었는데도 더 달라고 지랄이야. 나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잡힌 놈도 나와 대치한 놈도 자신도 모르게 '풋'하면서 웃어버린다.
"웃어? 뭐가 웃겨! 니들은 배 안 고프냐?!"
아차, 울컥해서 나온 소리에 나는 입을 돌로 찧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나온 소리를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잡힌 놈은 이미 자제를 할 수 없었던지 끅끅 대면서 웃어댔고, 나를 겨누던 녀석도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총구가 흔들리는 것으로 봐선 턱도 없는 일이었다.
"이 자식들이‥‥."
지금 내 상태는 안 봐도 알겠다. 아마 불그락푸르락해서 형형색색이겠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걸까 반추해보다가 결론이 나왔다. 저 분위기 파악못하는 영감태기 때문이지. 나는 그를 원망스레 노려보았지만, 저 영감태기는 뻔뻔하기만 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나? 어서 와서 식사들 하자니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6.
나는 빵칼을 놀리면서 내 앞에 앉은 녀석을 경계 어린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녀석과 시선이 마주친다. 막 숟가락으로 수프를 퍼먹으려던 녀석은 내 눈빛에 흠칫 놀라더니, 곧 눈에 힘을 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어쭈? 나 역시 안 그래도 강하게 부라렸던 눈을 이제 핏줄이 다 비치도록 힘을 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때 내 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물론 누가 쳤는지는 뻔하다. 나는 소총을 반대로 쥐어서 몽둥이처럼 들고 있는 노인네의 모습을 예상하면서 고개를 돌렸고, 적중했다.
"영감님!"
"눈 내리깔게."
아무리 노인의 힘이고 살살 내리쳤다지만 세게 내리치면 머리통을 부숴버리는게 개머리판이다. 그걸로 이렇게 사정없이 치다니. 나는 머리를 문지르면서 노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억! 영감님! 전 저 녀석이 쳐다봐서 그런거에요!"
더듬더듬 말을 하는 녀석의 머리를 영감님은 사정없이 내리쳤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이 녀석아."
이런 명언과 함께 말이다. 나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낄낄대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물론 영감님이 째릿 노려보자마자 푹 고개를 숙였지만.
'어쩌다 이렇게 된거람‥‥.'
살짝 한숨을 쉰다. 어젯밤에 노인과 함께 나눈 대화는 그의 가치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으니까.
「저들을 받아들이겠다뇨, 영감님! 저 놈들은 적입니다!」
「그 이전에 사람이네. 이렇게 보랴가 부는 밤에 어떻게 사람을 밖으로 내몰겠나. 백에 구십팔은 얼어죽을걸세.」
「영감님을 해칠지도 모르는 놈들입니다!」
「짐승들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설마 자기를 구해준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겠나.」
「영감님, 전쟁이에요. 적이라면 설사 자기를 구해준 사람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이 전쟁입니다.」
「후우‥‥. 지금 말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해할거라 생각했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네. 똑같은 사람 아닌가. 나는 제국에서 살아오면서 자네들을 악마 같은 인물로 묘사하는 사람들을 보았네. 하지만 정작 이곳에 건너와 살아보니 자네들도 똑같이 순박한 사람들이더군. 자네들과 그들은 같은 사람인데 왜 적국이란 이유로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 서로 헐뜯고 해치려 하는건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네.」
「‥‥적이라면 응당 그래야죠.」
「짐승들도 이유를 만들어서 싸우지는 않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싸우지 않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단체로 미친게야, 단체로.」
「영감님, 되도 않는 억지 부리지 마십쇼!」
「억지라고?」
「사람과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 놈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되도 않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는 바는 아니나‥‥회의감이 드네. 이제까지 살아왔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거 같아서‥‥모두 집단광기에 빠져든것 같아 그렇다네.」
'쳇‥‥‥.'
방금 전의 그것은 어젯밤의 복수가 틀림없다. 물론, 그 와중에 저 놈들과 서로 적대하지 않겠다고 억지로 약속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다시 녀석을 노려봤나보다. 또 다시 뒷통수에 충격이 가해진다.
7.
보랴가 부는 날. 밖에 나갈 수 없으며 이미 모든 것이 집안에 구비되어 있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전혀 없었다. 뭐 있어봐야 영감님의 식사 준비를 돕는 것 뿐. 그 외의 시간은 쓰고 써도 남아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방황하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는 내 눈에 띈 것은 그저께 내 빵칼에 목줄이 위협당하던 녀석. 나중에 녀석은 그게 빵칼인걸 알고 노발대발 화를 냈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문득 심심했던 나에게 녀석은 좋은 먹잇감이 되어줄 거라 확신한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이."
나의 부름에 귀를 쫑긋거린 녀석은 뒤를 돌아보았고, 마치 못 먹을 걸 먹은 사람 마냥 인상이 와그작 구겨졌다. 변겁해도 되겠네, 자식.
"보랴가 끝나면 보자고. 우리가 너네 그 철괴물 뭐시기에게 밀렸지만, 곧 네 놈들을 확 밀어낼 수 있을테니."
"풋, 전차도 모르는 야만인들 주제에 우리들을?"
툭 던진 미끼에 녀석은 덥석 물어버린다. 당연히 나는 화가 난 시늉을 하며 녀석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이 자식이, 뭐라고?! 야만인?!"
"쿨럭, 쿨럭‥‥!"
녀석도 마주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신장과 체격에서 크게 차이남을 깨닫고는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 몸을 던진 물고기를 회뜨는 낚시꾼 마냥 녀석을 천천히 요리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 카를을 안 놔줘?!"
‥‥어제의 데자뷰를 겪는듯한 외침과 함께 등에 가해진 충격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등에 가해진 충격에 멱살에 쥔 힘을 조금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네는 어째 레퍼토리가 이렇게 똑같냐?"
"‥‥?"
"이 녀석은 맨날 나한테 잡히고 너와 나는 또 다시 대치 상태가 되고 말이지‥‥."
내가 향한 곳의 시선을 깨닫는 순간 녀석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렸지만 늦었다. 빵칼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부엌칼을 집어들고 다시 카를이란 녀석의 목줄에 대자 녀석은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번엔 손에 총조차 들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
"난 네 녀석들이 이렇게 편히 집안에 있는게 맘에 들지 않아! 네 놈들이 자행한 약탈과 방화를 목격했어! 네 놈들은 죄없는 시민들에게 그 짓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편히 적국 시민의 집에서 늘어지고 싶은거냐?! 그건 내가 용납 못한다, 이 자식들!"
침이 튀기도록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나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힘을 주면 칼날은 목을 파고들겠지. 그리고 녀석의 경동맥을 단숨에 끊어버릴거고, 목이 따인 녀석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가래끓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숨지겠지.
나는 녀석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느끼면서 내 앞에 선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 때, 나에게 잡힌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 그랬어‥‥."
"‥‥?"
"믿지 못하겠지만, 우린 약탈과 방화 따윈 저지르지 않았어‥‥."
"무슨 개소리야! 네 놈들이 건물을 불태우는 것을 우리가 직접 목격했는데!"
"어떤 놈들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절대 그러지 않았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개자식! 그렇게 살고 싶어?! 그래서 네 놈의 되도않는 양심마저 팔아먹는거냐?! 부끄럽지도 않아?!"
"진짜야, 이 새끼야!"
녀석이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발 부대의 소속원들이 받은 강령은 '적의 시민들을 해하지말라.'야! 막말로 우리가 나중에 점령할 땅인데 그렇게 시민들의 인심을 잃을 하수짓을 할 거 같아?!"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거지?
"개소리 지껄이지마! 그럼 불탄 건물들은! 네 놈들이 불태운 건물은 뭐야?!"
"우리가 불태워‥‥?"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이번엔 나와 대치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건 네 놈들이 불태운 거잖아."
"‥‥?!"
"그 덕분에 우린 이 추운 날씨에 건물 안에서 잘 수 없었어. 말이 돼? 엄동설한인데 도시에서 막사를 펼치고 자야한다니."
그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이를 빠드득 가는 녀석의 표정 따윈 알바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은‥‥녀석의 말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가 불태웠다니? 훗날 그것은 청야작전의 일환이자 적들에 대한 적대감을 높이기 위한 헛소문을 병행시킨 흑색선전인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그런걸 알 턱이 없었다.
이해가 안돼서 멍하니 있는 나의 모습에 카를과 녀석이 슬슬 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딴 짓을 하려던 찰나였다.
"이 놈들─── !"
주변을 압도하는 고함이 들리면서 내 머리통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끅‥‥!"
나는 주저앉아서 미칠듯이 괴로워했다. 젠장, 망할 영감태기가!
"무슨 짓입니까?!"
"나와의 약속을 잊은거냐?"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보는 영감의 모습에 솔직히 소름이 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약속? 무슨 약속 말입니까. 저놈들과 친하게 지내란 약속이요?! 예, 전쟁 중에 잘하는 짓입니다. 아주 그냥 이적 행위로 신고당할 짓을 하라니."
"밖으로 보내주랴?"
‥‥이건 좀 무섭다. 하지만 나 남자, 보리스. 이런 시련에 굴복할 내가 아니었다.
"내보내든지, 구워삶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난 절대 저 놈들이랑 지내지 못하니까!"
나의 모습에 영감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런 나와 영감님의 모습의 눈치를 살피는 녀석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아는 적군은 저렇게 소심하지도 쥐죽은 듯이 있지도 않는다. 젠장.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던 영감님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저녁 때 보세."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버리신다.
8.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저녁 상은 훌륭했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영감님은 얼마 안되는 고기까지 올리셨다. 이스트향이 폴폴 풍겨오는 검은 호밀빵과 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트바로크와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얇은 케피르. 거기다가 추가된 메뉴는 본래 호밀빵에 발랐던 크림을 동동 띄운데다 파슬리와 처음보는 야채줄기를 넣어둔 말로만 듣던 전통식 스프 '보르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꼬치에 꼽힌채 토끼 고기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나와 녀석들은, 비록 아까의 일이 있었지만 이런 만찬을 두고 식탁에서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는지라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채 식탁에 앉았다.
"들게나."
영감님의 말에 먼저 달려든 것은 녀석들이었다. 검은 호밀빵을 게걸스럽게 집어 와구와구 삼키는 녀석들의 모습은 솔직히 말하면 적군인 내가 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네 놈들은 식사도 변변찮냐. 고작 그 정도 음식에 감지덕지하는 꼴이라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숨기면서 짐짓 녀석들을 도발했다.
그 말에 벌써 빵의 반절을 쳐먹던 녀석들이 울컥한 표정을 짓는다. 좋아 좋아, 단순한 녀석들이라 좋군.
"누, 누가 그렇다는 거냐?!"
"아아, 그냥. 우리는 맨날 지겨울만치 먹는 빵인데, 네놈들이 너무 맛있게 먹으니 약간 측은한 생각도 들고해서."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다만 지독하게 얼어붙어있고 가끔 곰팡이도 슬었다는 사실이 있지만 나는 그건 교묘하게 빼버린다.
"흥, 이깟 빵을 먹는다고? 네놈들 사정도 알만하네. 우리들은 이깟 딱딱한 빵이 아닌 보드라운 흰빵을 먹는다고. 거기에 잼이나 버터는 덤이지!"
"암, 그렇고 말고! 카를 말 잘했다. 사실 우리도 이런 식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란 말이지. 우리 부대에서 형편이 어려울 때 반찬 몇 가지 줄여서 이 정도로 나왔었단 말이야!"
"맞아, 원래 우리 부대였다면 여기서 맥주나 와인 정도는 곁들여야 진짜 식사라고 부를만 했단 말이지."
놀고있네‥‥. 나는 녀석들의 뻔히 보이는 허풍에 피식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래? 그럼 이 하찮은 음식들 먹어주기 어려워하는 거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나의 말에, 그제서야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한 녀석들의 안색이 딱딱히 굳어갔다.
"흐, 흥. 누가 도와준다고? 우린 적의 도움을 받을만큼 나약하지 않아!"
‥‥놀고 있다.
"허허, 내가 애써 마련해준 식사가 그렇게 하찮아 보였다니. 미안하네, 내일은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준비해주겠네."
영감님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녀석들의 안색이 질려 급히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영감님. 그게 아니라요‥‥."
그러나 곧 그의 표정과, 놀리는 듯한 나의 표정을 보고 녀석들은 그제야 놀림당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하얗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진짜 변겁해도 되겠어 이 녀석들.
"자, 자."
그 때 영감님의 부름에 나와 녀석들은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오늘 영감님이 이런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의도한 일이겠지.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한 나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은 다름아니라‥‥."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휴전을 제의하기 위한 것일세."
음?
"휴전이요?"
"적이라면서? 그럼 사이좋게 지내라 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내가 이 보랴가 끝날 기간까지라도 휴전을 제의하는 걸세. 이 폭풍이 끝나기까지 서로 피곤하게 얼굴 붉히지말고 잘 지내자는거지."
"‥‥."
잠시동안 할 말을 잊었다. 나와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역시 그날 밤처럼 숨길 수 없는 황망함이 드러나있었다. 또 다른 동질감을 느낀 나는 다시 고개를 영감님 쪽으로 돌렸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인데, 나는 제국 출신이기도 하고 이 곳 출신이기도 하네."
"‥‥?"
"제국에서 살다가 이 곳으로 건너왔지. 그리고 그곳과 이곳에서 느낀 것은 우린 모두 사람이라는걸세."
"‥‥."
나는 전에 들은거라 그리 감회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녀석들은 새삼 영감님을 바라본다. 자기와 같은 출신이라는 것을 느껴서 그런건가?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뭔가.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 서로를 적대시한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대는게 가당찮게 보이지 않는가? 자네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보이네."
나는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세월을 살면서 어떤 것을 느꼈길래 저러시는 것일까.
"물론 자네들은 그렇게 교육받았겠지‥‥.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이 자네들의 인생이라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겠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보랴가 부는 순간까지라도. 친하게 지내라는 말도 하지 않겠네. 그냥 어색하게 인사만 해도 좋으니까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이렇게 휴전 자리를 마련한걸세."
휴전이라‥‥. 나는 녀석들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오후, 녀석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려본다.
"저흰‥‥좋습니다."
그 때 카를 녀석이 입을 떼자, 옆에 있던 녀석이 놀란 눈으로 놈을 돌아본다.
"미쳤어, 카를?! 나는 빼! 저런 야만인 녀석과 친하게 지내긴 싫다고!"
"그만해 하인츠."
"넌 벌써 잊어버린거냐?! 저 녀석은 네 모가지에 칼을 들이댔어! 그것도 두 번이나!"
"알아, 하지만‥‥."
그는 영감님쪽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나도 영감님 생각과 같아."
"‥‥."
"왜 우리 젊음을 국가에 바쳐야할까? 왜 우리의 목숨을 국가에 바쳐야할까? 거기에 소속되었단 이유로? 국가가 우리의 편의를 봐준다는 이유로? 하지만 국가는 우리가 만들어낸 거야. 우리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세금을 내고 총을 들어 지키지. 하지만, 이런 전쟁은 달라‥‥."
놈은 괴롭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난 아직도 내가 죽인 녀석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나. 그리고 녀석이 '엄마'를 부르짖은 것도 아직도 내 귀청을 떠나지 않고 있어. 그래, 좋아. 국가가 우리들의 편의를 좀 더 봐주기 위해 이런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자. 하지만, 고작 그걸 위해서 사람을 죽이라고? 내 목숨을 총알 하나 따위에 날려버려야 한다고? 나도 그게 이해가 안돼."
녀석의 얘기가 뒤죽박죽으로 섞인다. 뭐라 말하는거야 저 녀석. 그러니까 지금 놈은‥‥괴로워하고 있는건가? 왜? 적을 죽인게 왜 괴롭다는거지?
"카를‥‥."
하인츠라 불린 녀석은 녀석의 모습에 놀랐는지 주춤하면서 녀석을 낯설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이봐요, 그 쪽."
녀석이 나를 부르자 나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사과드립니다. 국가를 대신해서, 그리고 혹시 모르게 당신들의 시민을 해쳤을 모를 그 동료를 대신해서, 그리고‥‥내가 죽인 그 사람에게‥‥사과드리겠습니다."
울컥하는 감정이 고개를 든다. 지금 녀석이 뭐라는거지?! 사과? 사과라고?!
"웃기지마."
내 말에 녀석은 나를 바라본다.
"사과? 지금 장난하나?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을 유린하고, 아내에게 남편을, 어머니에게 아들을, 딸에게 아버지를 국가가 뺏어가게 한 놈들이, 우리에게 피흘리게 한 놈들이 고작 그 사과 한 마디로 해결될거 같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게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적군의 모습은 이런게 아냐. 왜 그래? 너희들은 나에게 총을 겨누어야해. 너희들은 우리의 시민을 약탈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야해. 너희들은 우리 국가를 위협하는 악마들이여야 한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거냐고, 대체 왜!
"‥‥받아들이겠네."
무겁게 말씀하시는 영감님의 모습에 나는 그에게 버럭 소리쳤다.
"영감님!"
"더불어 내 사과도 받아들이겠나. 혹시라도 나의 아들인 디미트리 페트렌코가 자네의 동료를 죽였을지 모르는 것을 내가 대신‥‥자네에게 사과하겠네."
"‥‥그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놀고 있다. 나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방향을 튼 식탁을 보면서 차마 분통을 터뜨릴 수 없어 씩씩댔다. 그건 나만 느낀게 아닌 듯 했다.
"야, 넌 저거에 동의하냐? 지금 저 상황이 말이 되냔 말이야?!"
하인츠란 녀석이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내게 입을 열었다. 난 니가 나에게 말 거는게 더 말이 안되는거 같다‥‥. 나는 녀석이 말한 사실 중에 틀린 사실을 친절하게 정정해준다.
"‥‥'야'가 아니다. 보리스다."
9.
"‥‥보랴가 약해지는군.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도 되겠네."
머리에 눈을 한가득 이고오신 영감님이 말하자, 카를과 하인츠가 진짜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네 놈들은 저 정도도 견디지 못할거 같아?"
나의 비웃음에 녀석들은 역시 또 울컥한다.
"무, 무슨 소리냐!"
"우리 대 제국의 용사들이 저깟 추위를 못 견딜까?!"
‥‥정말 놀고 있네.
"그래, 그러길 빈다."
녀석들의 변함없는 단순함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분위기에 한숨을 쉬면서 내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휴전' 이후 6일이 지났다. 보랴는 예상 외로 빨리 멎을거 같았고, 오늘 마침내 밖으로 나가본 영감님은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되겠다고 하신다.
휴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끝나는거지. 그리고 나가기만 해봐. 내가 네놈들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줄테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나는 뺨이라도 맞은 마냥 화들짝 놀라면서 스스로 붉으락 푸르락 해진다.
'저 놈들은 적이야. 적이라고! 친구 따위도 뭣도 아닌 지금 휴전중인 적일뿐. 지금 이대로 있지만 밖으로 나가서 다시 전장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의 심장을 겨누게 될 사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녀석들을 돌아본다. 또 다시 뭐로 시비가 붙었는지 서로 말싸움을 하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상상속으로나마 녀석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당겨‥‥당겨‥‥당겨‥‥당겨‥‥당‥‥. 당‥‥.
'못 당기겠어.'
그리고 스스로 내린 결론에 스스로가 놀란다. 어느새 이렇게 된거지? 어느새 녀석들의 단순함에 전염되어 버린건가. 어느새 녀석들의 티격태격함이 없으면 심심해진건가? 어느새‥‥카를 녀석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게 된건가‥‥.
"씨발."
스스로 내린 결론을 번복하고 싶어진다. 나는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아버린다.
10.
"이제 보랴가 다 그쳐가는 것 같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의 응접실. 영감님은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거세게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이제 그 기세가 슬슬 그쳐가고 있었다.
"확실히‥‥내일이면 그치겠군요."
나의 말에 영감님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영감님은 나와 녀석들을 둘러보면서 말하셨다.
"떠나보내기 전에‥‥자네들에게 한가지 부탁이있네."
"‥‥?"
"전에 언급했지만, 내겐 장성한 아들이 있네. 그 녀석을 지금 군대에 보냈지."
"‥‥아."
혹시 그 '디미트리'란 녀석 말하는건가?
"‥‥'디미트리 페트렌코' 녀석은 나약한 녀석일세. 그래서 사람을 죽일 방아쇠라고 당길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래서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네."
"‥‥."
"우선 보리스. 자네는 만약이라도, 그 녀석을 만나면‥‥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구차하게라도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전해주게."
"‥‥예."
"그리고 만약‥‥죽었다면‥‥."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기도 싫으신 것이 눈에 보인다.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스스로 끔찍해하는 표정. 하지만 영감님은 애써 말을 이으셨다.
"‥‥하다못해 녀석의 천조각 하나라도 나에게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들."
"예, 영감님."
페트렌코 노인의 부름에 카를과 하인츠도 긴장한 채로 그를 바라본다.
"녀석은 나약한 아이일세. 만약 전쟁터에서 녀석을 본다면‥‥한번 지나쳐주게.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무시해주게."
"‥‥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카를의 부정적인 견해에 페트렌코 노인은 애써 웃음 지으신다.
"약속‥‥약속만 해주게나. 그것만 있으면 이 늙은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네."
"‥‥미안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커헉!"
"이 녀석 말은 무시하세요. 네! 약속하죠! 빈말이 아니라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영감님! 빈말이 아닙니다요! 혹시라도 항복해서 포로로 잡혀있다면 특별 편의를 약속해드리죠! 만약 부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고 서약을 한다면 제가 몰래 놓아보내‥‥으윽, 왜!"
"가능하지 못할 약속은 하지마."
"왜, 왜?! 이게 왜 불가능한데?!"
"지금 무단 방면을 약속하는거다."
"참, 너도. 국가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주절거린 주제에 그걸 지킬 맘이 나냐?"
"‥‥변했구나, 너."
"크큭, 이제 알았냐."
뭔가 정신 없이 돌아가는 대화에 마무리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에 나는 커흠 헛기침을 지른다.
"그럼 영감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온 부대를 뒤져서라도 페트렌코란 녀석을 찾겠습니다."
"‥‥흔한 이름에 흔한 성일세. 가능하겠는가?"
"녀석의 특징만 말해주십시오. 찾을 수 있습니다. 이래뵈도 온 부대에 인맥이 걸쳐져 있는 왕발이니까요."
나의 말에 노인은 아들의 특징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걸 들은 나는 순간 들은 생각에 흠칫했으나, 곧 머리를 흔들어 지워버린다. 아닐거야, 아니야.
"‥‥그럼 부탁하네, 자네들에게."
노인의 말에 우리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휴전은 7일째로 접어든다.
11.
"‥‥잘들 가게나."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던건지, 페트렌코 노인은 눈물까지 지으면서 우리들을 배웅하셨다. 방한복을 차려입어 평소 체격의 배 이상이 된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어제의 약속을 다시 상기하였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말 뿐이라도 고맙네."
빈 말이 아니다. 솔직히 집안에 깽판을 치는 이 놈을 보랴 기간 내내 받아주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새삼 고마움을 느끼면서 나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12.
퍼석 퍼석
허리까지 쌓여있는 눈을 헤치면서 나가는 건 꽤 고역이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불편한 동행을 하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자식들이 그 때의 북적거림은 어디서 사라진건지‥‥. 결국 심심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먼저 침묵을 깼다.
"근데‥‥왜 나한테 이걸 입으라는거지?"
집을 나서기 전 카를이 준 제국 방한복을 보면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짐작했겠지만‥‥이 근처는 벌써 우리가 점령했다. 그러다가 그 '보랴'가 불어닥쳐서 부대에서 떨어져나가 조난당한거지."
그런가‥‥. 벌써 적들이 이 근처에 우글거린다니. 나는 당황하면서도 카를이 이 옷을 입힌 의도를 알아차렸다.
"‥‥고맙다."
나의 말에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쪽이 우리 부대 방향이야. 너희는 저쪽일거다. 이만 여기서 갈라지자."
"‥‥그래."
"혹시 다른 녀석들 만나면 21사단 이글윙 부대 소속의 3소대 2분대원이라고 해라. 하인츠와 카를의 이름을 대면 녀석들도 의심없이 넘어갈거야."
나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문득 서운함이 밀려들어옴을 느껴진다. 아아‥‥정이 든건 영감님 뿐만이 아니었구나.
"‥‥몸 조심해라."
"훗."
"전쟁터에서 만나지말길 바란다!"
먼저 가던 하인츠가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친다. 나와 녀석은 피식 웃으면서 그것을 보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낀다.
"‥‥잘 가라."
"‥‥?!"
실행하면서 솔직히 잘하는건지 못하는건지 긴가민가하다. 어쨌든 녀석은 적이었고 빠르면 내일이라도 전쟁터에서 만날 녀석이니까.
하지만‥‥‥그렇다고 못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린 같은 인간이니까.
"‥‥고맙다."
카를 녀석은 멋쩍어하면서도 내 손을 꽉 쥐면서 악수를 나눈다. 나는 그 때 못한 얘기를 마저 한다.
"너희들의 사과 받아들인다. 그리고 더불어 내 사과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
"‥‥큿, 그래. 하인츠 녀석 말대로 부디 전쟁터에서 만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 미련없이 등을 돌린다. 이제부로 끝날지도 모르는 인연, 더 붙잡아서 무엇할까. 그 때 카를이 말한다.
"Der Weg in die Zukunft bis zum Ruhm und Wohlstand des Menschen."
"‥‥?"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제국어.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녀석을 뒤돌아보았지만, 녀석은 미련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눈밭으로 녹아들어간다.
13.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수도 앞까지 침탈당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우리 조국은 제국에서 오랜 전쟁에 지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세가 반전되었다. 먼저 제국의 가장 큰 규모의 해군 기지였던 킬 군항에서 해군들이 전함 샤른호스트 호를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에 연계하여 제국의 전 지역에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우리 수도 앞까지 진을 쳤던 제국군은 황급히 짐을 챙겨 달아나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저항 없이 손쉽게 영토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정말 끝나는건가, 이 전쟁."
그 이후 1년. 그 동안 나는 디미트리 페트렌코란 이름과 영감님이 말해준 용모파기를 작성해서 전 부대에 돌려보았지만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전사한 것인가 해서 전사자 묘소에 찾아가봤지만 그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혹시나해서 야전병동에 가봤지만 그 곳에는 동명이인들만 많을 뿐 정작 내가 찾는 페트렌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아. 영감님 볼 면목이 서지 않는데."
나는 벅벅 머리를 긁으면서 계속 산길을 올라갔다. 패잔병을 찾는 수색 작전에 포함된게 잘못이었다. 겨울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눈은 이제 뭉치고 뭉쳐 얼음이 되어서 자칫하면 미끄러져 굴러떨어질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있지도 않는 적군을 찾아내는 것보다 발밑 얼음을 찾아내려 애쓰면서 걷는다.
그 때였다.
"수색 종료랍니다, 분대장님!"
"그러냐?"
몇 시간이나 걸린 산행 끝에 드디어 종료했다는 수색 작전에 분대장님도 반색한다. 나 역시 조금은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쉰다.
"그리고, 집결 명령이랍니다."
"뭐?!"
젠장, 쉬어가긴 글렀군. 나는 내려놓으려던 소총을 다시 집어들었다.
"어딘데?!"
"그게‥‥."
14.
아니지?! 아니지?! 아닐거야, 그, 그렇겠지. 설마, 설마‥‥.
무전병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사고회로가 마비되어 버렸고, 나는 그대로 대열을 이탈해서 그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맞을, 빌어먹을!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산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영감님."
목소리가 떨려온다. 무릎 꿇려진채 있는 세 명의 제국군과 그리고‥‥‥페트렌코 노인.
"영감님!"
나의 부르짖음에 그의 고개가 내쪽으로 돌려진다. 그리고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보리스!"
왜 저기에 저렇게 계시는거야. 영감님은, 영감님은 저렇게 될 분이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씨근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나를 가로막는 시찰단만 아니었다면.
"무슨‥‥."
"이 자는 패잔병들을 숨겨준 중대한 이적 행위를 한 사람이다. 이 자를 어찌 알고 있는거지?"
"‥‥‥."
그때서야 나는 제국군과 영감님이 같이 무릎 꿇려진 이유를 깨달았다.
"‥‥나를 구해준 사람입니다."
"그런가?"
"보리스! 디미트리는! 디미트리는 어찌 되었나?!"
그 때 영감님의 외침에 나의 표정도 굳었다.
"‥‥디미트리! 디미트리는!"
"뭐야, 이봐! 저 놈 입 막지 않고 뭐해!"
"예!"
"아, 안돼! 그 분은!"
그렇게 대접받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영감님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퍽!
"크흡!"
"죄송합니다. 저희 분대원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어느새 따라온 것일까. 머리를 강타한 무언가에 의해 나는 앞으로 쓰러졌고, 그런 나를 누군가 끌고가기 시작했다.
"자네는?"
"저 놈의 분대장입니다. 저 놈이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건 아닙니다. 그저‥‥."
"됐네. 사상 검증을 받아도 충분할 상황이지만, 저 자에게 은원이 있다 하니 이번은 넘어가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가 아프다. 왜 이리 띵한걸까. 눈 앞이 이지러지는 듯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네 놈들은 우리 조국의 강토를 침탈하고 게다가 그것으로도 모잘라서 우리 국민들의 터전을 불태웠으며 또한 그들이 겨울 내내 먹어야할 식량을 약탈해갔다!"
아냐‥‥저건 거짓말이야. 우리가 지어낸 거짓말‥‥.
"본래 네 놈들을 우리 국민들에게 맡겨 조리돌림을 해야함이 옳으나 그건 잔혹한 처사로 판단되어 이에 자비를 베풀겠다."
그 '자비'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 의미를 알아챈 패잔병들은 울부짖으면서 무언가를 소리쳤으나, 그것을 묵살하면서 시찰장교가 소리쳤다.
"총! 받들어!"
철컥
"조준!"
철컥
"발사!"
탕───탕───탕───!
3발의 총성. 그리고 단번에 스러진 3명의 목숨. 어쩌면 죄없을 억울한 생명을 적이라는 이름 하에 묶어 청소해버린다. 나는 이 명백한 사실에 구역질을 느끼면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
그는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디미트리는? 디미트리는?! 그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 했다.
'‥‥죄송합니다, 영감님.'
"네 녀석은‥‥."
그 때, 시찰장교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때서야 노인의 상황을 떠올린 나는 빽 소리쳤다.
"안돼!"
"적을 숨겨주는 중대한 이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런게 아냐!!"
"이 자식이, 미쳤어?! 조용히 안해?!"
내가 몸부림치자 분대장님이 당황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다시 소리쳤다.
"저 분은 그저! 사람을! 적이 아니라 사람을 도왔을 뿐이라고! 그냥 그런 의미야! 이적행위도 뭣도‥‥윽!"
머리에 다시 충격이 강타한다. 골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놔버릴것 같았다.
"정신차려 이 자식아! 저 놈은 시찰장교야! 저 놈 말이 곧 법이라고 이 자식아!"
내 귀에 속삭이는 분대장님의 말, 그리고 시찰 장교의 외침과 총구를 겨누는 시찰대원의 모습. 나는 그 모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면서 눈을 감았다.
15.
전쟁은 끝났다. 제국은 반란에 의해 자멸해버리고, 우리들은 그동안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제국으로 침탈해 들어갔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제국에게 당한만큼 갚아주었고, 우리들은 신의 가호를 받아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가 역사가 기록할 내용이겠지.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달랐다. 자유를 위해 싸우던 시민들은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그리고 약탈과 방화가 이루어졌다. 제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해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인종 청소. 완전히 우리가 점령한 제국령에는 피와 화염만이 넘실댔다.
이것이 우리가 외치는 정의이자 정의의 승리. 과연 그런걸까‥‥?
"영감님‥‥대답해주세요. 이게 정말 옳은 걸까요?"
그러나 노인은 대답이 없다. 당연하다. 땅속에 누워있는 분이 대답해주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대답이 듣고 싶었다. 우리가 한 짓을 보고 호되게 꾸짖어 주셨으면 좋겠다.
"‥‥네? 대답해주세요. 영감님‥‥."
그러나 돌아올리 없는 답.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손에 쥔 꽃을 무덤 앞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보았다.
Der Weg in die Zukunft bis zum Ruhm und Wohlstand des Menschen(그대 길 앞에 빛나는 영광이 있기를).
‥‥비석에 적힌 구절을 보면서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 살아있었구나‥‥. 나는 애써 웃으면서 뺨에 흐르는 것을 닦아내었다.
* 우유비지, 치즈 |
전쟁만큼 어리석은 짓을 이 인류사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 총점 : 37.5+1점(최우수)
(1) 주제 : 13점
◎ 심사위원 A : ★★★★
- ‘전쟁이야말로 집단광기의 최고봉이 아닐까’란 댓글의 감상처럼 이익추구, 사명감과 책임감의 부재, 잘못된 정보, 의도적인 인식의 오류 등등 수많은 이유들로 집단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기계적으로 죽이고 학살하고 괴롭히는 것을 자행하고, 동참하고, 정당화하는 전쟁은 그야말로 ‘집단광기’입니다.
◎ 심사위원 B : ★★★★
- 전쟁이 퍼트리는 광기와 그 안에서도 조금씩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려내고 있는데 작품이 전개되는 배경을 보았을 때 제 1차 세계대전과 크리스마스 휴전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닌가 합니다. 주제 자체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지만 적절한 변주를 했습니다.
◎ 심사위원 C : ★★★★★
-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주제로 비슷한 구도를 보인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이 연상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2) 문체 : 12점
◎ 심사위원 A : ★★★
- 이야기를 전달하고 살리는데 무리가 없는 담백하고 탄탄한 문장이었습니다. 먹는 음식이나 낯선 이름, 낯선 언어 등에 대한 묘사와 서술, 첨가 등은 그 자체로 이야기에 이국적인 풍미를 가미했습니다.
◎ 심사위원 B : ★★★★
- 주제가 상당히 무겁지만 문체는 의외로 가벼운 느낌을 줍니다. 이 때문에 자칫 어두운 분위기가 될 수 있는 작품의 무게감을 상당히 덜어주어 글을 읽어나가는 데 부담을 상당히 경감시켜주었습니다. 다만 너무 억지스럽게 가벼움을 연출하는 부분이 있어 흐름을 깨트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심사위원 C : ★★★★★
- 깔끔합니다. 담백한 문체로 전쟁의 집단광기를 표현한 부분이 훌륭했습니다. 글의 분위기가 너무 장황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없었기에 긴 글을 읽으면서도 별달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전쟁의 비극성만 부각될 수 있는 내용을 적합한 문체를 통해 흐트러짐 없이 잘 이끌어갔습니다.
(3) 구성 : 12.5점
◎ 심사위원 A : ★★★☆
- 단선적인 구조의 드라마입니다만 특별히 그 이상의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이야기 자체에 이미 비극과 감동이 충분했습니다.
◎ 심사위원 B : ★★★★
- 사실 적대적인 두 세력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군인들이 서로간의 마음을 연다는 게 그렇게 간단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럴싸한 이야기의 흐름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장편으로 쓸 만한 이야기를 단편으로 압축한 탓에 흐름이 너무 빠른 부분이 조금 발생하긴 했습니다. 또한 노인의 아들 ‘드미트리’가 일종의 맥거핀처럼 되어버렸는데, 장편이라면 모를까 단편에서 이런 설정은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 심사위원 C : ★★★★★
-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전개였습니다. 주인공의 생각의 변화를 노인과 같은 장치들을 통해 개연성 있게 진행시키는 등 힘든 부분을 잘 구성했습니다.
(4) 총평
◎ 심사위원 A
- 긴 분량임에도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양측의 군인들이 적군에 대한 반감으로 으르렁거리다가도 노인의 주도 아래 천천히 친해지고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고, 노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에선 상당히 몰입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짧은 기간 내 다른 나라의 낯선 풍습을 그려냈다는 것 또한 조금 놀라웠습니다.
◎ 심사위원 B
- 현실에서도 이미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전쟁이라는 광기 속에서 피어나는 인류애는 흔한 소재이고, 비록 단편이라는 한계 때문에 약간 서두르는 감이 있었지만 ‘조금 뻔하지만 그래도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광기와 인류애 사이에서 어느 것에 더 방점을 둘까 갈팡질팡한 느낌이 있으며, 서로 다른 국적의 군인들이 만나자마자 쉽사리 의사소통이 되는 부분 역시 개연성의 측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심사위원 C
- 분량이 상당히 길었지만 깔끔하고 늘어지지 않는 전개에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또한 소설의 앞과 뒤에 배치된 노인의 아들과 노인의 죽음을 통해 주인공의 생각의 변화를 부각시켜주었습니다. 어려운 소재를 부드럽게 잘 진행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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