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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연재/릴레이소설 이벤트 극검의 꼬리를 물어라![완]

릴레이소설 이벤트 극검의 꼬리를 물어라! - 네번째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글쓴이 따뜻한 봄

 

  자신의 배낭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책에 다시금 생각이 미친 철우는 발작처럼 몰려드는 흡연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담뱃값의 형이상학적 상승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시작된 그의 금연은 종종 입수되는 담배에 의해 쉽사리 깨지곤 했지만 지금은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설사 가지고 있더라도 헬멧 안에 연기가 가득 차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욕구의 파상공세에 저항하며 그는 책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마지막 인류학자의 기록’

  과거였다면 문학적 수사로 취급되었을 책의 제목은 오늘날엔 그저 사실의 담백한 고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류학자라는 항목 대신 역사학자, 철학자, 윤리학자, 환경학자 등 무수히 많은 학문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과 미래를 노래하는 학문이 수평선 너머로 침몰하고 절망과 현재를 외치는 전쟁이 떠오르는 시대였다. 철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배낭에서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책은 상당히 두꺼운 편이었지만 미리 표시를 해 두었기에 그가 원하는 부분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남아있던 내가 모든 데이터를 갈무리 해 탈출 준비를 완료한 것은 파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2월 28일이었다. 이때엔 ‘운석’을 바로 코앞에서 관측할 수 있다는 이점도 더 이상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힘들만큼 주변의 침식은 진행된 상황이었기에 이젠 도망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내가 연구소를 떠나기 직전 계측기가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모든 바늘이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나는 갈등을 했고 결국 다시 계측기 앞에 앉았다. 이 선택이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란 걸 모른 체]

  거기까지 읽은 철우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엎드렸다. 처음엔 작게 들리던 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마침내 요란스런 괴성으로 변했다. 몸을 더 바닥에 바짝 붙이며 그는 낮게 혀를 찼다. 낮엔 놈들의 움직임이 덜할 거란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상태에선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숨죽이고 엎드려있기를 10여분, 겨우 소리가 멀어지자 철우는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원래는 좀 더 전진한 뒤 잠을 잘 곳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이렇게 적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 근처에서 하루 자면서 향후 이동경로를 탐색해보자고 마음먹은 철우는 단말기를 조작해 이 근방의 지도를 불러냈다. 몇 대 남지 않은 위성으로부터 송신을 받은 지도는 근처에 동굴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대강 방위를 확인한 그는 단말기를 끄고 걸음을 옮겼다. 부디 그 동굴 안에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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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숨죽이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동굴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누는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느릿느릿 이어지던 대화는 거의 10분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마침내 대화가 끝났는지 동굴 밖에 있던 존재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어쩐지 느낄 수 있었다.

  “선배, 잠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절 부르고 있어요.”

  여자는 미안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알려왔다. 나는 희미한 의식 너머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런 손길로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곧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주셔야 해요?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먹으면 되니까. 그러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어요.”

  여자의 손은 희미한 온기와 압도적인 혐오감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기진맥진한 나는 그에 대해 분노를 표할수도, 거부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저 부들거리는 시선을 그녀에게 던질 뿐. 여자는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갔고, 그런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나의 시야는 천천히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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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우는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목표로 한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일찌감치 머무를 장소를 탐색하자는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며 은근히 뿌듯해 한 그는 서둘러 동굴 입구에 들어섰다. 그러나 기쁨은 동굴 안으로 채 다섯 걸음도 진입하기 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의 발에 밟히는 미끈거리는 물질은 이 동굴이 놈들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는 걸 웅변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고민을 했다. 이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다른 장소를 물색하느냐? 흔적을 살펴본 그는 이 자취의 주인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는 결론을 얻은 뒤, 일단 안을 탐색해 본 뒤에 안에 머물지 아니면 줄행랑을 칠지를 결정하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쓰고 있던 고글을 적외선 모드로 바꾼 뒤 신중히 전진하던 철우는 곧이어 동굴의 끄트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동굴의 상태는 양호했으며 무엇보다 동굴 여기저기 칠해진 놈들의 분비물을 제외하면 별다른 환경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머무를 만하다고 생각한 그의 귀에 나지막이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바짝 긴장하며 무기를 앞으로 겨눈 철우는 곧이어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이제까지 들어온 수많은 괴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인간의 목소리였다.

  ‘사람이 있다고? 잡혀온 건가?’

  철우는 충격을 억누르며 고민했다. 이 근방은 이미 놈들의 손에 들어간 지 2년이 넘은 지역이라, 잡혀 올만한 인간 자체가 남아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철우는 떠나오기 전 받은 브리핑에서 인간의 유전자를 흡수하여 마치 사람처럼 목소리를 내는 식으로 사냥감을 유혹하는 개체가 등장했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혹시 그런 종류의 적인가? 의심이 계속 그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철우는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에 접근을 계속했다. 만약 실제로 사람이 잡혀와 갇혀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구출하든 해야 할 것이고 만약 자신을 속이는 거라면 깔끔하게 해치우고 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다. 철우는 둘 중 어떤 경우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소리의 진원지로 걸어갔고, 마침내 그 대상을 발견했다.

  철우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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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스라이 흔들리는 시선 끝에 뭉툭한 발끝이 잡혔다. 그녀가 돌아온 건가? 그러나 고개를 조금 들어도 보이는 것은 두 개의 발뿐이었다. 처음엔 의아함이, 뒤이어 놀라움이 나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녀가 아냐?

  “이봐, 정신 차려보라고.”

  눈에 이어 귀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그녀가 아님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가 아닌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 그럼 누구인 걸까? 설마 또 다른 외계인? 내가 마침내 미쳐버려서 외계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가벼운 혼란에 빠져 있는 내 이마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단단하고 무거운 느낌, 쇳덩이였다. 마지막으로 촉감이 나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아아…….

  ‘인간이다.’

  “정신이 드나? 자신이 누군지 알겠어?”

  너무도 익숙해서 도리어 낯선 인간의 말이 귓속을 울렸다. 그러나 거의 모든 기력을 상실한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해석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저 단말마처럼 한 두 마디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귀로, 뇌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금 의식의 사슬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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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우는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금 기절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벌레의 체액이나 다리를 지저분하게 묻힌 모습이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정도였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상대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살아있는 모습이야 확인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 외계생물이 득시글거리는 대지의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도 애매한 자를 대하는 방법은 출발 전의 브리핑에서도, 지급받은 매뉴얼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버려두고 동굴을 떠나는 것이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상황에서 남까지 챙겨줄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 혹여 조금 여유가 있더라도 언제든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존재를 등 뒤에 달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합리적인 고려는 이 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희미한 목소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도와줘. 제발.”

  “어휴, 모르겠다.”

  철우는 상대를 겨누고 있던 화염방사기를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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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 죄송해요. 생각보다 일이 길어져서…… 지금 막 돌아왔어요.”

  여자는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동굴로 돌아왔다. 말은 미안해 하지만 전혀 미안해하지 않은 태도로 걸어 들어오던 그녀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있어야 할 상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정말로 죽어버린 걸까? 느긋하던 그녀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황급히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 그녀가 본 것은 여기저기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들과 온기조차 자취를 감춘 텅 빈 공간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1. 안녕하세요. 따봄입니다. 작품을 쓴 것도, 후기를 쓴 것도 무척 오랜만이라 전부 어색하군요. 한 1년 정도 되었나요? 이번 이벤트로 그동안 굳어있던 손을 좀 푼 것 같아 감개무량한 느낌입니다. 그것도 릴소라니!

2. 아니 근데 1년 넘게 쉬고 있었더니 과연 손이 안 움직이는군요. 예전에 월하님이 오랜만에 소설을 쓰려고 했더니 전혀 써지지 않는다는 눈물어린 수다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제가 딱 그 꼴입니다. 아니 이 얼마 되지도 않는 글을 쓰는데 대체 며칠이나 걸린겨?!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ㅠㅠ 아니 그래도 왕년엔 릴레이 소설이 주력이었는데 ㅠㅠ 사태수습 전담반으로 한 명성 날리지 않았나요? ...아닌가?

3. 일반적으로 들이는 시간에 비례해 글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건만 전 어째 더 떨어져만 가는 걸까요... 장르가 친숙하지 않은 분야인데다 소설 초반에 난무한 떡밥을 어떻게 해석하고 소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무척 많았습니다. 일단은 최대한 소설의 배경을 확장시키고 구체화시키는데 지면을 할애했습니다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자신이 없군요.

4. 그래도 오랜만에 글을 쓰니까 머리가 좀 돌아가는 느낌이라 좋네요. 방학이기도 하고 이참에 작품활동이나 재개해 봐? 하는 느낌이 조금씩 드는데 과연 할 수 있을지...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의 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