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이야기
글쓴이 네이브아케아
비밀을 안고 산다는 것은 가슴 속에 수백 개의 바늘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형용할 수 없는 고뇌와 외로움에 차라리 생을 끊을까 하고 머릿속에서만 벌써 수만 번 내 머리를 터트렸다. 이곳 제 3 관측기지는 이름도 없는 ‘ 230-94-03941 구역 ’ 으로 불리고 있었다. 신호가 들어오면 회색의 철판 컴퓨터에 보내온 메일을 확인하여 미션을 수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의 비밀은 이 미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차가운 진눈깨비가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재학 중이던 서울대 대학원 천문학과에서 명망 있는 닥터 프로레시블라가 이끄는 신자원개발팀에 고영진 교수님께서 발탁되셨다. 닥터 프로레시블라는 캄차카 반도에서 발견된 신종 미생물의 유전물질 tayos olegolia를 망막색소변성증(R.P: Retinitis Pigmentosa) 신약 개발에 응용한 러시아 의학자였다. 그는 행동하는 과학자로 병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극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생물을 발견하는 것에 더 활동적이었다. 캄차카 미생물은 그의 최신 연구 조력자였고 세계는 또 한 번 그에게 ‘Walking Man’이라 칭송하며 희귀병 치료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프로레시블라가 우리 대학원 연구실에 직접 방문했을 때 고영진 교수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이메일로 방문을 통보받았을 때에도 이만큼은 아니었었는데 늘 근엄하셨던 얼굴이 문득 지나갔다. 사진이나 다큐, 뉴스 보도에서만 봤었던 프로레시블라는 생각보다 말쑥한 외모에 영어도 유창하게 말했다. 항상 덥수룩한 수염을 한 러시아 사냥지기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수염을 깎고 고급 정장을 입은 것을 보니 딴 사람 같았다. 어쨌든 그날 이후 교수님은 러시아로 가기 위해 준비했다. 나와 제자들에게나, 언론에나 모두 신자원 개발 프로젝트라는 말만 한 채 자세한 일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프로레시블라 박사의 행동 경향을 볼 때 시베리아 같은 혹독한 곳에 가지 않을까라는 오들오들한 생각이 들었다. 혹자들은 미국의 천문학자 존 킴벨과 고영진 교수가 팀 멤버인 것을 거론하며 러시아의 또 다른 우주 연구 프로젝트가 아니냐며 떠들어 댔지만 금세 파묻혔다. 대학원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한 명만 뽑힌 경우를 들며 샴페인을 들었지만 불행히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교수님의 출국을 흔쾌히 축하할 수는 없었다. 당시 가온 은하계 관측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이었는데 차질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물론 교수님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할 것이며 이메일과 전화로 컨텍을 주고 받을 거라 했지만 사실상 프로젝트 중단이나 다름이 없었다. 샴페인을 들던 날 밤, 그러니까 출국 하루 전날 밤 그도 신경이 쓰였었는지 나를 조용히 불러내어 말했다. “ 자네도 함께 가겠나? 솔직히 한국 사람은 나 혼자뿐이고 우리 연구도 계속 이어가야지 않겠나. 내가 조교로 데려간다고 하면 허락해 줄 걸세. ” 뾰로통했던 내 표정은 희망에 찬 얼굴로 바뀌었다. 넙죽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나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왔고 연구소에서 납치를 당하기 전까지는 설렘과 기대로 즐거워했다.
하얀 세상에 나홀로 물줄기를 맞으며 알 수 없는 스피커 속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나 웅웅댈 뿐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독 냄새가 가득한 그 세상에서 빠져 나오자 또 다른 하얀 세상이 나왔다. 희미한 눈동자를 거듭 깜빡이자 선명해졌다. “ 이 자료들 빨리 보내주세요. 네. 기지로 소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결과 나왔습니다. 네. 자료 곧바로 갈 겁니다. 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연신 전화를 받고 거는 부서가 왼쪽에 있고 오른쪽은 도서관보다는 산만하게 쌓여 있는 A4 프린트물이 보였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곧바로 경호원에게 제지당했다. 죄수처럼 양팔을 붙들고 안쪽으로 깊숙이 데려갔다. 얼마나 감시가 심한 지 몇 번의 카드와 지문감식에 강철 문이 열렸다 닫혔다 그야말로 철통보안이었다. 러시아어와 다른 언어가 번갈아 들려오니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가는 내내 소심하게 두리번댔지만 처음 보는 문자와 코드가 벽면에 쓰여 있고 연구소의 마크로 보이는 포인세티아가 박힌 아가일 무늬가 한 번씩 보일 뿐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들이 데려다 준 곳은 지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탔었는데 숫자는 없고 카드를 대는 인식 버튼만 있어서 몇 층으로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지하는 예상과 달리 따뜻했었고 하얀 세상도 없어졌다. 검푸른 복도에 휘청거리는 전등을 지나 철문을 열었다. 투명한 돔 형태의 유리벽으로 둘러싼 사무실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일종의 중앙 통제 관리실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이 연구소의 실체가 드러났다. 언뜻 봐도 큰 축구장 같은 규모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통제복인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도 무리지어 다녔다. 그리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의자가 앞으로 돌아갔다. 키가 작은 아니 9살 정도의 소년이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한 그는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프로레시블라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연구실 가운이 들려 있었다. 가슴팍에는 내 얼굴과 이름, 소속이 적힌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 아이는 소중한 존재예요. 인지능력이 예민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풍부하죠. 아시나요?” “ 닥터 프로레시블라, 이게 무슨 연구이며 여기가 어딥니까?” “ 영진 박사는 곧 뵐 수 있을 겁니다. 질문이 많겠지만 나도 할 일이 많아서요.” 그는 내게 옷을 넘겨주고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서려던 찰나 뒤돌아선 채 말했다. “ 아포칼립스. 여기가 바로 아포칼립스입니다.”
아포칼립스. 20여 년 전 학회에서 이론을 발표 중이던 한 해부학자가 갑자기 러시아와 미국이 제 51구역에서 비윤리적인 실험을 거행하고 있다고 밝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실험은 생체 실험이었고 두 번의 세계 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세계인의 가슴을 또 한 번 쓸어내리게 했다. 자신의 손으로 희귀 동물들의 다리를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다리에 연결하는 사진을 보여준 후 무릎을 꿇고 가져온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이 사건은 두 나라의 재력과 국력으로 무마되었고 잠잠해졌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간간히 비윤리적인 실험의 예로 교과서에 오르내렸다. 러시아의 ‘아포칼립스’라니 너무나도 끔찍했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옷을 챙겨 입으며 찰랑거리는 이름표가 몹시도 무거웠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이곳은 흡사 대학병원의 응급실 같았다. 체계적으로 보이지만 뭔가 부산스러웠다. 경악했던 실체는 여과 없이 보였다. 희귀동물이라기에는 내가 어렸을 적 보던 소설책의 일러스트. 검고 커다란 두 눈에 초록색의 점들이 박힌 진흙같은 피부에 촉수는 8개, 소설 속 주인공 엘리스는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불렀다. 외계인의 질척이는 피부를 메스로 갈라 핀셋으로 고정하고 드릴로 갈비뼈를 뚫고 장기를 꺼내 놓았다. 드릴에 들썩이는 외계인의 저 검은 눈동자에는 학부 때까지 꿈꿨던 환상과 신비의 우주 비밀이 가득 차 있을까 생각했다. 외계인들은 해체된 채 포르말린이 담긴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외계인의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그들의 귀는 이미 마비된 듯 했다. 서둘러 고영진 교수님을 뵙고 싶었다.
교수님은 안색이 창백하셨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드시고 계셨지만 이야기 하는 내내 손을 덜덜 떠셨다. 교수님의 얘기는 실로 놀라웠다. “ 나도 여기가 아포칼립스일 줄은 몰랐어. 미국 유학 중에 아는 선배가 으레 불꺼놓고 공포 괴담 말하듯 흘려들은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일 줄 정말 몰랐어. 너도 봤겠지만 이곳은 외계인을 연구하는 곳이야. 얼마 전에 캄차카 부근에서 또 우주선이 떨어졌다고 하더군. 그 안에 꽤 많은 조종사들이 타고 있었지. 한국이 너무 그립다. 서울로 돌아가면 곰장어에 소주를 마시고 싶군. 아포칼립스에서는 외계인 침공 대비를 하고 있단다. 미래를 위해 식량 저장, 대피소, 침공에 따른 무기 개발 등을 하고 있지. 자네 내가 죽으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더 이상 대화는 무리였다. 교수님은 충격 때문인지 횡설수설하셨다.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도 힘차게 ^^월요일 보내세요~
* 릴소 넘 재밌네요. 스타일도 내용도 각기 다른 사람들이 소재들을 이어가며 글을 짓는 다는 게 멋진 것 같습니다. ㅎㅎ 저만 재밌는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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