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리치도 예언자
-상기 1-
누군가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발생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어떤 어마어마하게 강대한 의지-흔히 '신'이라고 부르는-가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대다수의 존재들이 동의함에 틀림은 없다. - 그들 중 하나인 나 -
-상기 2-
2012년 12월 21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 마지막 인류학자의 기록 중 -
-상기 3-
아포칼립스란 무엇인가. 단순히 ‘게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러시아와 미국의 은밀한 연구 단체에게 있어서는 그런 쉬운 의미는 아닌 모양이다. 아포칼립스란 단어는, 이 외에도 전혀 관계없는 상당한 군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마치 종교적인 단어처럼, 그저 그 이름을 붙이는 게 누군가의 뜻 이기라도 한 것처럼…… 만약 여기에 정말 누군가의 의사가 있다면, 나는 그 의사를 ‘음모’라 규정하고 조사하고자 한다. - 비밀을 간직한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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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 Ⅴ : Secret mission>
그것은 철우가 폐교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메시지였다.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을 하고는 헬맷의 디스플레이 마스크를 내려 닫고, 소음권총을 두 손으로 곧이들어 겨눈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밀 임무라니? 전쟁은 승리로 끝났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저 나는 잔당을 처리하고 접속을 종료함으로서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내일 출근을 준비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도 생겨났다. 상당 기간을 투자해서 이어온 외계인들과의 전쟁은 가상 게임이 아니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박진감과 긴장감으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충격들이 플레이어를 지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나친 자극은 인간을 무디게 만든다. 반복되는 살육과 언제 아이디가 지워질지 모르는 공포의 연속, 그것은 결코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겪는 비밀 임무라니, 꽤나 신선하다. 이런 건 인터넷 어디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내용이다. 현승진이라는 인간인지 외계인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존재를 만난 시점에서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좋아, 어디, 뭐가 나올지 확인해 볼까.”
폐교는 총 5층에 3 개의 건물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복합 구조였다. 한 가운데에는 운동장이 있고, 학교 밖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어 만일의 경우 탈출로로 이용하기 요긴해 보였다. 건물은 일단 차례대로 조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현승진이 과연 이 폐교 안으로 기어들었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금세 그런 조바심은 기우임이 드러났다.
―타다다다다닥……,
명백히 인간의 발소리로 들리는 소리가 학교 내부에서 들려왔다. 암흑 속에서 낮아진 기압으로 인해 소리가 울리기는 했지만, 그는 베테랑이다. 발자국, 냄새, 소리의 움직임과 간섭을 고려하여 파악한다면 표적의 위치 예측 정도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서쪽 건물이다.
일단 목표를 잡은 이상, 그는 몸을 낮추고 신속히 이동을 개시했다. 아까부터 외계인이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점은 수상했지만, 언제라도 튀어나오면 대응할 자신은 있으므로 문제는 되지 않는다.
****
B.C. 그래, 나는 그녀를 B.C.라고 부르겠어. Beautiful Clear는 참 아름다운 단어지만 부르기에는 길어. B.C. 어라, 이거 서기 전 같잖아.
“선배, 왜 그러세요?”
승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걸음을 멈추었음을 인지했다. 몸이 기우뚱 기울더니 풀썩하고 쓰러지려는 걸 그녀가 부축한다. 어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 인간이었던 감각으로 몸을 움직이면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일까. 아니, 하지만 나는 레지던트의…… 어라, 나 뭐였지, 그 명백한 걸 잊을 리가 없는데…… 어라,
그 때, 승진의 다리가 쩌억 갈라졌다. 말 그대로 다리 한 쪽이 두 개가 된다. 완력을 버티지 못하고 바지가 약 90퍼센트 가량 찢어져 버린다. 거기서 드러난 다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시커멓고 뾰족한 털이 송송 달려 있는 절지동물의 것이었다.
“으아아……, 으아아아악!!”
비틀 거리며 이번에는 뒤로 쓰러지려 하는데 다른 쪽 다리도 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진 덕에 균형을 잡았다. 네 다리의 감각이 낯설기 짝이 없다. 변하고 있다……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고 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선배,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오, 오지 마! 만지지 마! 날 내버려 둬!”
다가오는 손길을 뿌리치며 승진은 두 팔을 마구 휘둘러 댔다.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는 두 팔을. 흥분으로 피가 끓어오르고 호흡곤란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여자는, 저 여자는 누구지, 나는 분명 저 아이를 ‘알고 있을’ 터다.
“선배, 아직도 망설이고 계신 건가요?”
“다…… 닥쳐! 아……, 아니, 미안…… 젠장, 내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시간이 없어요. 곧 그들이 와요. 선배, 절 믿으셔야 해요.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어요.”
“살아남는 방법?”
“……선배의 꿈이 이루어지는 방법이요.”
“내 꿈……? 기억이 나질 않아……. 내 꿈이 뭐였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가서, 그저 잘 먹고 사는 것…… 전부 잊어버리셨어요? 제게 세상은 만만치 않다고 말해주신 것도 전부…… 선배잖아요.”
“먹고 사는 것……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괜찮아요,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저를 믿어주세요. 저만 따라와 주세요. 그러면 모두 잘 될 거예요.”
그녀, B.C.가 손을 건넨다. 잠시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승진은 이내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멀리서 누군가의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녀는 승진의 손을 꽉 붙잡고 그 무수한 다리를 우아하게 다스리며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진은 네 개가 되어 버린 다리의 감각이 전혀 적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그녀를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의 의식은 아직 인간의 것이었다.
비록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하나,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
철우는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3층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올라가던 소리가 도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목적지를 바꾸었나? 아니,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따돌리려는 속셈인가.
1층까지 다시 내려오고 나서 철우는 복도 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를 확인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소리는 지하로부터 들려왔다. 이런 폐교에 지하실이 마련되어 있었단 말인가. 비상식적이군. 그는 근처에 있는 부근을 전부 조사했지만 올라가는 계단 외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던 낡디 낡은 철문 하나를 제외한다면.
이제 여기 밖에 없지.
그는 소음권총으로 자물쇠를 쏴버렸다. 끼이익 거리며 열린 문의 뒤에는 틀림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 이쪽으로 간 것은 아니겠지. 자신들만 아는 별개의 루트를 이용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쪽은 빙고인 듯하다. 저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들린다.
지하로 내려오니 더 이상 달빛에도 의존할 수 없는 칠흑이 그를 덮쳤다. 그러나 문제는 되지 않는다. 박사 과정을 도중에 때려 치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 약 5년 간, 쉬지 않고 게임에 몰두해온 그다. 게임 속에서의 훈련이라면 누구보다 독하게 했다. 실전 경험이라면 월드 랭커 수준이다. 겨우 이런 작은 미션 하나가, 그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꺾이는 길에서 벽 뒤에 몸을 숨긴 뒤에, 소리의 변화에 주시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소리는 이내 바로 앞에 있음을 분간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커졌다. 타이밍을 노리고, 다시금 소음권총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으며, 그는 신속히 복도로 나서며 표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숨바꼭질은 끝이다. 어…… 어라?”
그러나 거기 있던 것은 현승진이 아닌,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은’ 그야말로 8개의 촉수를 가진, 외계인 그 자체였다.
“제, 젠장! 이거 뭐야!”
외계인이 괴성을 지르며 연달아 촉수를 찔러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뒤구르기로 벽 뒤로 숨었고, 동시에 권총을 집어넣으며 화염방사기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화염방사기를 지향사격 자세로 고쳐 쥐는 순간, 그는 쉬지 않고 다시 뒤로 도약해야만 했다. 촉수가 연달아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외계인이 천장으로 올라간다. 그가 다시금 총을 겨누자 일순간 촉수가 칼날처럼 화염방사기를 두 쪽으로 절단했다.
“뭐, 뭐라고옷?!”
쭉 앞으로 뻗어오는 촉수를 피하기 위해 외계인을 향해 정면으로 슬라이딩 하면서, 그는 다시 한 차례 땅을 굴렀다. 구르기가 끝나는 순간 이미 소음권총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쏠 타이밍을 놓쳤다. 촉수의 반응이 너무 빠르다. 이렇게 근거리에,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칠흑 속에서, 외계인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베테랑인 그라도 처음이었다.
더욱이 화염방사기까지 소실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헷, 가까이서 싸우면 이렇게 민첩한 녀석들이었나.”
연달아 불규칙적으로 쏘아져오는 촉수를 어둠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동체 시력으로 회피한다. 이것은 거의 묘기 수준이다. 녀석에게 지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체가 천장과 벽, 바닥을 움직이며 현혹하는 것은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촉수들은 시간이 갈수록 동작이 날카로워지고 위협적이 되었다. 학습하고 있다? 아니, 설마, 내 움직임을 예측하고 잡으려 드는 것인가?
“이크!”
하마터면 촉수에 위장이 정면으로 뚫릴 뻔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첫 번째 날아온 촉수를 피하기 위해 우측으로 온 힘을 다해 몸을 빼는 순간 그 경로로 두 번째 촉수가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학습―같은 게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전술이다. 외계 생물 따위가, 지능 같은 것은 없는 존재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수 없이 죽여 온 저들은 사실, 우리와 같은 지성체였다, 는 것이다.
아니, 우리보다 나은, 지성체일 수도 있다.
정말로 나은 지 아닌지는, 시험해보면 금세 알 수 있겠지. 철우는 잠시 주변을 힐끔 살펴보았다. 녀석의 너머에 반쪽이 난 화염방사기와 흘러나온 연료가 널브러져 있다. 기억에 의존하자면 그의 등 뒤로는 한 번 꺾이는 길이 있고 T자형 세 갈림길이 존재 했었다.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은 무엇인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해주자.
그는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뒤로 재주넘기를 했다. 거기에 반응이라도 하듯 타이밍을 맞춰 촉수들이 일제히 찔러 들어온다. 그러나 T자 갈림길에서 그가 아슬아슬하게 벽 뒤로 숨는데 성공하자, 촉수들은 그저 너머의 벽에 우루루루 박혀버릴 뿐이었다. 그대로 박힌 촉수를 빼내지 못했으면 좋겠건만, 거미 다리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는 절지동물 형태의 촉수는 순식간에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이미 성공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그저 단 한 발의, 총알을 발사할 타이밍을 버는 것이었다. 그는 그 순간 소음권총을 집어넣었다. 대신 가스총을 들고, 적의 위치도 확인하지 않고 T자 갈림길 중앙부로 한 발을 발사한다. 액화 이산화탄소가 순식간에 기화되며 공간을 가득 메워갔다. 칠흑속에서 처음부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철우에게 그건 아무런 변화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적에게는 분명한 효과를 가져 오고 있었다.
방금 전 녀석의 공격들은 명백히 철우의 위치를 ‘보고’ 공격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극도로 제한된 시야 속에서 매우 얕은 명암의 변화와 소리만으로 적의 공격을 파악한 것과는 달리, 적의 그 정확한 공격은 시각이 허락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으로 적의 시야를 차단했다. 남은 것은―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적을 향해 정면으로, 가스를 빠져나오는 순간 촉수세례를 받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도, 망설임 없이 그는 돌진했다.
스윽 하고 가스층을 뚫고 나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촉수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촉수는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그가, 가스 밖으로 튀어나올 때 바닥을 달리는 것이 아닌, 우측 벽에 발을 딛고 뛰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고정관념을 동반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변화구에 잘 대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녀석의 또 다른 약점은, ‘인간보다 그렇게 큰 몸무게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
촉수만 없다면 무서울 것은 없다. 철우는 그대로 적에게 몸통박치기를 먹였다. 천장에 붙어 있던 녀석이 짜아악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그는 한 손으로 가스총을 집어 던지며, 반대 손으로 소음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을 겨누는 순간, 녀석의 몸뚱이는 쪼개진 화염 방사기의 연료 위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소음기에 먹힌 조그마한 총성이 들리고, 폭발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화악 일어 올랐다.
그 모든 일이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외계인의 ‘쉬―쉬―’거리는 비명 소리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린다. 꿈틀꿈틀 대며 마지막 발악을 해보지만 신경계가 이미 말을 듣지 않는 듯 촉수는 흐늘흐늘 거리기만 할 뿐 힘을 잃었다.
“휴우. 방해물이 끼어들어서는.”
그는 땅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하고서, 잠시 동안 불타는 그것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비밀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자, 그는 몸을 돌려 땅에 떨어진 가스총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철컥. 둔탁한 쇳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닌 셀 수 없는 개수로. 철우의 귀에 너무도 익숙한 그 소리는 소총의 장전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군인이 있을 리가?
갑자기 조명이 일제히 켜지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은 상대가 들고 있는 플래시라이트였다. 잠시 광순응 때문에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곧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도의 중앙, T자형 세 갈림길에 현승진과 B.C.가 나란히 서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셀 수 없는 외계인들이 줄줄이 서서 총으로 철우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좌우를 조용히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두 자루의 총을 모두 땅바닥에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쳇…… 퀘스트 실패인가…….”
그 때 두 사람이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철우는 잠시 후 승진이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그의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와 상당히 변했음을 알아챘다. 그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라기보다는, ‘그것들’에 가까웠다. 옆에 있는 여자는 훨씬 더 그것들에 가까웠으므로, 둘의 모습을 비교한 철우는 금세 합당한 추리를 하나 내릴 수 있었다.
“하…… 그런 건가…… 당신,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가…….”
“무슨?”
“무슨이라니, 자기 모습은 보고 하는 말이야? 어이, 이보소. 지금 당신의 모습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요. 가요. 선배.”
철우를 무시하고, 둘은 그를 지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멀리서 그를 겨누고 있던 외계인들이 다가와 철우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인간이기를…… 포기…… 합성…… 잠깐, 생체실험? 외계인? 자신을 정의? 아!”
어디선가, 오래 전에 듣고 잊고 있었던 이야기.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해 실행한다던 멋들어지지만 무섭기 짝이 없던 이야기. 비인도적이면서도 신에게 거역하는 것만 같아 배덕감을 일으키던 흥미로운 이야기.
“아포……칼립스?”
철컥, 총구가 그의 등에 닿았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 따윈 없다. 여기서 자신을 죽일지 아니면 포로로 끌고 가려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쪽이던 그는 이미 게임 오버다. 살아날 방법 따윈 없다. 기회 따윈 없다…….
“안 돼에에에에에에!”
―아직은 그만 둘 수 없다.
그는 그 순간 괴성을 지르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자신의 등을 겨누던 총을 뒷발질로 차올리며 몸을 돌려 총기를 탈환, 자신을 포위한 네 마리를 일순간에 순살 했다. 그 직후 일제히 쏟아지기 시작하는 포화에 몸을 굴려 시체를 방패삼아 피한다. 완벽한 자살 행위다. 어쩌면 포로로 삼아줬을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스물…… 20 대 1인가…… 헤, 헤헤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자조하며 웃었다.
―아직, 퀘스트의 결말을 보기 전에는 끝낼 수는 없어.
****
B.C.가 스위치를 올리자, 넓은 공간 전체를 밝히는 조명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그 웅장한 광경을 승진이 둘러본다. 입이 절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운동장 넓이와 맞먹을 규모의 그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것은 무려 ‘거미 둥지’들. 그것들의 본거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B.C. 다시 한 번만 물어봐도 돼?”
“네. 뭐든지요.”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건, 설마,”
“네. 인류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인류는 아무 것도 몰라요. ‘저들’은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압도적인 세력, 인류보다 상위의 지능. 비록 기술력은 인류보다 딸릴지 몰라도 저들에 의해 인류는 멸망합니다. 이것은 필연이에요.”
“너는…… 대체…….”
“선배는, 아포칼립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포……칼립스…….”
“인류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아니, 아니죠. 대항이라니, 턱도 없는 헛소리죠.”
그 말을 할 때 B.C.의 표정은 이해할 수 없게도, 황홀해 보였다.
“인류가 그들이 되기 위해 만든…… 기적이에요.”
그때였다. 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갈라지기 시작한 중심의 틈으로부터 운동장의 모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좀 기다리고 나자 달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그곳에, 하늘을 통째로 뒤덮는 규모의 비행물체가 나타나, 수많은 조명을 지하실로 뿜어냈다. 한 가운데 출입구가 열린다. SF영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비행기의 바닥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해 그들, 승진과 B.C.의 눈앞까지 내려왔다.
“선배, 보세요. 결국 저들은 우리를 그들 중 하나로 인정해 주었어요. 기뻐해주세요. 우리는 이제 살아남은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승진의 정신은 비로소 안개가 걷힌 것처럼 깨끗해졌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이전의 기억 따위 이제는 모두 잊었다.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이었다.
“자, 가요, 선배. 더 이상 인간으로 남아 있지 말아요. 우리의 꿈은 저곳에 있어요……. 우리의 진정한 꿈은…….”
승진은 주변을 두어 차례 둘러보았다. 그의 오른편에, 누가 버려둔 피스톨이 한 자루 있었다.
****
“하아…… 하아…… 하아…….”
팔 하나가 완전히 소멸. 두 다리는 반병신 상태. 머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다. 옆구리 쪽에도 총알을 세 방은 맞은 것 같아 한 손으로 지혈하고 있지만 손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우는 모든 외계인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그는 지금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들을 쫓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잊고 있었던 5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단서는 오늘 주웠던 정체불명의 문서에 쓰여져 있던 이름― 고영진.
마침내 지하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처음에 경악하고 말았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미 고치의 군단들. 이곳이야말로 녀석들의 전초기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는 다음 순간 바로 옆에 사람이 있음을 발견했다.
더 이상 인간의 형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남자, 그럼에도 승진임에 틀림이 없는 한 남자가, 오른손에 힘없이 권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에서 연기가 스르륵 올라온다. 그의 앞에는 여자―임에 틀림없는 외계인이, 검은색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
그 순간 승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발견했다. 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 어떻게 해석해도 한 가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으니까.
“으, 으흐흐― 생존도, 행복도, 내 꿈도― 흐흐, 내 발로, 전부 걷어차 버렸네요. 흐흐, 흐흐흐, 난― 나란 놈은―”
“그리고 당신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소.”
“……인간. 이런 몸으로 인간이라니…….”
그 때였다. 하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우주선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 직후 밤하늘에서 그들에게 보인 광경은― 셀 수 없는 운석들이 불 붙어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모습들…….
“아아. 왔구나. 드디어 저들이 왔어.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것들이. 아아아아, 그래. 나는 인간이야. 인간으로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써 죽고 싶었어. 저기 당신, 미안하지만 혹시 가진 종이나 펜이 없습니까?”
그 때 철우는 오늘 주웠던 이상한 책을 기억하고 건네주었다. 승진은 펜을 손에 쥐고 조용히 책을 바라보더니 뭔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합시다. 나는 인류의 마지막 인류학자……. 저들에게 인류가 멸망하는 모습을 기록한 유일한 사람…….”
“그래서, 첫 마디는 뭐라고 적었소?”
“2012년 12월 21일…… 지구는 멸망했다.”
“아니, 당신은 틀렸소.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어.”
“……무슨 근거로?”
“왜냐하면 이건 게임이니까.”
철우의 말에 승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2018년 1월…… 어딜 봐도 지구는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어요. 이런 기묘한 게임이나 운영하고…….”
“그럴 리가…… 그럼 아포칼립스는…….”
“아포칼립스? 그건 내가 하고 있는 이 게임의 이름이지.”
“아냐. 아포칼립스의 진짜 의미는―”
그가 다음 말을 하려는 순간, 철우의 부서진 헬맷의 디스플레이 창에 <퀘스트 클리어!> 라는 문구가 뜨더니, 순식간에 모든 배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우는, 강제접속종료 되었다.
****
이것은 박철우가 고영진에게 보낸 메일이다.
『교수님, 이렇게 갑자기 메일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질문을 올립니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최근에 저는 아포칼립스라는 게임을 플레이 해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단어가 교수님과 참석했던 그 실험의― 아포칼립스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야, 그때는 러시아 발음이었고, 이 게임은 한글로 적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게임 속에서 주운 이상한 문서로부터 교수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문득 이 두 가지는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 즉 2013년 1월에 저희가 참석했던 아포칼립스……. 그것은 도대체 뭐였던 걸까요. 아포칼립스란 무엇인 걸까요? 저는 이것에 누군가의 엄청난 의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영화처럼, 엄청난 세력의 음모가 뒤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가 두서없어서 죄송합니다만, 교수님께서 뭐라도 아시는 게 있다면, 꼭 답변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고영진의 답변 메일이다.
『박철우 학생, 아니지, 지금은 어엿한 회사원이겠군. 대리? 아니면 전무인가? 내 쪽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미안하지만, 학생은 신이 있다고 믿나? 나는 믿지 않는다네. 인류가 이토록 과학을 발달시키는 동안 우리는 어디에서도 신의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야. 이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고, 다른 질문을 하지. 그래. 우리는 예전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얘기했었다. 비밀리에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인류는 외계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한다― 그것이 아포칼립스였다. 하지만 정작 외계인 그들에 대해서 자네에겐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군.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보다 상위의 종이야. 인류보다 막대한 세력과 지성을 지닌 존재들인 거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신을 믿는다. 2012년 12월 21일, 최초로 지구가 침공을 당한 날짜.―비록 세간엔 운석이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때 그들은 신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살던 곳에 없었던 신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 자, 자네가 게임 아포칼립스를 했다면, 그래, 아포칼립스의 의미 정도는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 외의 것은 스스로 조사해보도록 하게나.
아포칼립스란, 저들이 섬기는 신적 존재를 상징하는 어떤 단어야. 그러니 아포칼립스라는 건 게임, 생체실험 뿐만 아니라, 어느 것에든 붙을 수 있는 이름인 것이지. 그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은 그들과 관계있음을 숙지하길 바란다.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또 연락 주기를.』
안녕하세요. 리치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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